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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누가 알아?>

나와 같은 사람, 나와 다른 사람. 선택은?

by 예나

더스틴과 연락이 끊기던 시점, 필립과도 꽤 오래 연락을 안 하고 있었다.

이때쯤 필립도 나에게 말실수를 하나 한 게 있어서 나는 화가 난 상태였고, 필립도 연락을 꽤 오래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프라하에서 다른 여성과 한 달간의 로맨스를 즐기고 있었다.

필립은 나에게 이 여성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더스틴에 대해 필립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더스틴과 나는 첫 데이트만 한 사이이고, 그 이상의 특별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키스도 안 한 사이이다.

필립은 이 여성과 한 달간 '로맨틱한' 짧은 연애를 했다.

한 달이면 이번 4월 나와 함께 한 시간과 동일하다.


필립은 평소 전여친에 대해서 아주 편하게, 자주 말하는 사람이다.

전여친들은 항상 필립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넌 전여친 얘기를 너무 많이 해."

한동안 나에게 이 한 달의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다가, 나와 프라하에서 만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을 한참 즐기던 중 갑자기 이야기했다.

"너에게 말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서.


일본에서 딱 한번 만난 사이이고, 진지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얘기를 들으니 너무 짜증이 났다.

굳이 왜 이제 와서 얘기를 하나 싶기도 했다.

내가 그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때마다 후회가 됐다.

'묻지 말걸.'

나는 왜 그녀에 대해서 지금껏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필립은, 잘 모르겠다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 사람이랑 너를 비교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던 것 같아."


필립에게 그녀는 로맨틱하고 좋은 기억이었지만 나와는 달랐다.


나는 필립에게 물었었다. 그녀가 떠나던 날 슬펐냐고.

필립은 말했다.

"아니, 우리 둘 다 한 달만 만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예상하고 있던 헤어짐이었으니까."

한 달간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고 어떻게 조금도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떠나기 전날 나는 필립에게 물었었다.

"내가 내일 떠나서 슬퍼?"

그는 슬프다고 답했다.


나는 그 답을 예상 못해서 가볍게 웃으면서 물어봤는데, 그는 정말 슬퍼 보였다.


그날 하루 종일 필립은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내가 떠나는 날 우리는 둘 다 울었다.

우리의 헤어짐도 알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달랐다.





나는 한 달 내내 그의 여자친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부르면, 혹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르도록 놔두면, 헤어짐이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그게 필립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렇다.

대단한 약속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필립이 한 번씩 가는 가게 사장이 그를 나의 남자친구라고 부르든 말든, 내가 그걸 고쳐줄 이유가 뭐가 있겠나.

그냥 웃어넘기면 되는 걸, 평소의 나처럼, 가볍게.

하지만 나는 그런 오해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굳이 말했다.

선을 긋는 듯, 벽을 세우는 듯한 나의 말을 살짝 속상한 티만 내고 몇 번은 그냥 들었는데, 필립은 사실은 그게 많이 신경 쓰였던 것 같다.

내가 떠나기 전날 필립은 그 이야기를 꺼냈었다.

한국의 문화가 그렇다는 건 알지만, 여기선 그게 아니라고.

그냥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귀는 관계가 되는 것이지, 오늘부터 1일 이런 식으로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되는 게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물론 "오늘부터 1일"이라는 말을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건 꽤 큰 단계가 아니냐고.


내가 오늘 너의 여자친구면, 내일 내가 떠나고 나면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되냐고.


필립은 답하지 못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편하게 말하는 '전여친'만은 절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곧 떠날 걸 아는 나는 그의 여자친구일 수 없었다.

지금은 진지한 관계나 연애를 할 수 없다는, 롱디는 절대 못한다는 그를 위해 나도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인데, 그의 속상함이나 서운함을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야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참..

나의 그런 반응은 참 차갑고 상처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프라하에 있는 한 달 동안 나는 매일 남은 날짜를 셌다.

마치, 내가 떠나고 나면 그와 있을 시간이 끝나는 것처럼.

그게 마지막인 것처럼.

나는 아쉬움에 몸부림쳤다.


필립은 그러지 않았다.

왜 계속 떠날 날을 카운트 다운 하고 있냐고 했다.

그냥 지금 나와 보내는 시간을 즐겁게 보내자고.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고.

그러고 싶었지만, 짜증 나게도 현실적인, 이성적인 생각이 자꾸 나를 멈췄다.


한 번은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며 말한 적이 있었다.(나는 잘 운다. ㅎ)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번 달이 끝나면, 뭔가 끝나는 건 맞잖아. 다시 만나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달라질 테니까."

필립은 말했다.

"그걸 누가 알아?"


그 뒤로도 필립은 내가 관계의 끝을 예상하는 말을 할 때 그걸 누가 아냐고 답했다.

서로에게 헛된 기대와 희망을 주지 않고자 하는, 이전의 상처로 새로운 시작이 조심스러운 필립은 한번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우리의 상황이 안타깝지만 어쩌겠냐며. 어쩔 수 없지만, 여기서 끝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안다는 듯이 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도 그 말에 맞춰 그를 대했던 것이다.

남자친구로 대하지 않았던 것도 그랬고, 그를 힘들게 했던 나의 다른 행동들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다면 그게 가장 큰 오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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