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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연애에 대하여>

모노가머스한 내가 쓰는 글.

by 예나

나와 만나며 그는 변했다.

천천히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장난처럼 우리의 결혼이나 미래 아이들에 대해 농담하기도 했다.

말의 무게를 아는 필립은 진심이 없으면 절대 그런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끝을 예상하며 슬퍼하는 나를 그렇게 단정 짓지 말라며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떠나 있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없다고 했다.

나에게 깊은 사랑의 감정이 있지만, 조심스럽다고 했다.


자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가지면서도, 떨어져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예상하는 그가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에게 그 선택은 우리 사이에 만들어 낸 어떤 소중한 공간을 다른 사람으로 희석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은 나에게 필립과의 관계를 희석하는 선택이었다.

필립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돌아오고 싶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함부로 그런 약속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돌아오면, 당연히,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걸 원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했다.

함부로 그런 약속을 해서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필립은 나를 사랑하고, 나와 다시 함께 할 날을 기다리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그 이유가 외로움이든 지루함이든 우연이든.



다자연애(폴리아모리)는 여러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연애 방식을 말한다. 그 반대 개념은 모노가미이며 한국어 번역으로는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흔히 일부일처제라고 한다.

퀴어 문화에서 다자연애는 너무나 흔한 일이며, 최근은 소수인권 운동에 핫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들은 전통적이고 유연하지 않은 가족과 사랑의 형태에 의문을 던지며, 인류는 본래 모노가미에 익숙한 종족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독교 교리와 도덕 개념이 세상을 지배한 뒤 최근에야 생긴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 질투 등에 대해 정확히 알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나면, 다자연애는 모두에게 조금 더 쉬워질 것처럼 이야기한다.

폴리아모리/모노가미가 성정체성처럼 선택할 수 없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자라면서 선택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그 부분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부분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전에 말했듯 나는 분명 모노가머스한 사람이고, 누군가를 좋아할 때 다른 사람을 만나고 데이트하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필립은 언젠가, 만약 자신이 선택을 한다면 일부일처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이후부터 할 이야기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가끔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만 일단 적어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프라하에서의 한 달간 내가 보였던 말과 행동이 그에게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나를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도록 부추긴 면이 없지 않았다.

아니, 많았다..

그에게 나는 어쩌면, 말로만 모노가미를 외치며 사실은 다른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프라하에서 지낼 때, 우리가 갑작스럽게 서로에게 푹 빠졌던 며칠의 시간이 있었다.

그의 '말실수'에 내가 화를 내며 그의 집을 뛰쳐나갔던 밤 이후 이틀 뒤 일이다.



그날까지 나는 필립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과도 데이트하고 있었다.

필립은 나를 만나는 동안 다른 여성과 데이트하지 않았다.

내가 다른 남성과 데이트를 하러 갈 때마다 그는 나를 그저 기다려야 했다.

그게 그를 괴롭게 하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데이트에서 돌아오면, 그는 너무 궁금해서 힘들다면서도, 두려움에 데이트가 어땠는지 나에게 묻지도 못했다.

다만 돌아왔을 때 내 몸이 차가우면, 데이트 내내 야외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안심할 뿐이었다.

필립을 너무 좋아했으면서도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 건, 그가 계속 나에게 자신은 지금 연애를 할 준비가 안되어있다고 말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음이 커지지 않으려고, 나를 지키려고 그렇게 했었다.

이유를 정확히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준비가 안되었다는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행동이 그에겐 다르게 다가왔다.

나는 "너는 나에게 특별해."라는 말을 하면서도 여러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다른 남자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절대 그런 말은 해본 적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필립은 믿지 않을지 몰라도 정말 필립은 다른 남자와는 달리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싸웠던 그날 밤 그는 "우리의 관계를 가볍게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너"라는 식의 농담을 했고, 나는 그 말에 심장을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도 못 하며 말했었다.

"너에게 너무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했던 노력이었어. 네가 그걸 원치 않는다고 계속 나에게 말하니까.

내가 원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내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 그는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냥 내가 다른 남자도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준비가 안된 자신에게 내가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저 고백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I thought we were on the same page."


물론 동의하고, 무슨 말인지 알지. 너가 그렇게나 자주 이야기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작아져?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나만의 장치를 준비했던 것뿐이야.


나는 그의 집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12시가 다된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갔다.

제발 가지 말라는 그를 뿌리치고.

하지만 나는 이틀을 채 못 버티고 그에게 다시 돌아갔었다.

'어쩌면 4월이 지나면 이 사람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데.

지금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데,

나에겐 아직 2주의 시간이 남았는데,

그 시간 동안 그를 안 보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그에게 만나자고 한 뒤 이렇게 고백했다.


"너는 지금 연애할 준비가 되지 않다고 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니 알겠어. 이해해. 하지만 너는 절대 나에게 가벼운 사람이 아니야. 처음부터 말했잖아. 너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야. 난 이제 다른 사람 만나고 싶지 않아. 너만 만나고 싶어. 다른 사람 만나면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를 계속 만나고 싶다면, 네가 그걸 알아야 돼. 우리의 관계가 가볍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걸, 내가 널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고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상태여야 돼. 그래도 날 만나고 싶어?"


그는 "당연히 그러고 싶다"고 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몸을 부대끼다 보면 그도 나에 대한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이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을 그는 나보다 더 정확하고 절실하게 알지만,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틀 뒤, 집에 빨래를 두고 와서 집에 잠시 갔다 오려는 나에게, 룸메이트한테 전화해서 내 빨래를 대신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겠냐고 물으면서까지 나를 집에 보내지 않았다.

나의 고백 이후 우리는 3일을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그 3일간 그는 더 깊은 고백들을 했다.

왜 지금은 깊은 연애를 하기 어려운 상황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결국 말해줬다.

들어보니 지금 필립은 정말 쉽지 않은 상황에 있었고,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드디어 그 이유를 말해줬을 때 나는 깊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어. 그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부분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너의 상황이 힘든 건 이해하지만, 사랑이 찾아오면 그냥 오게 둬. 모든 여자가 특별한 삶을 원하는 건 아니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냥 평생 함께할 사람을 원할 뿐이야. 모두가 돈이나 어떤 수준의 생활을 기대하고 바라는 건 아니야. 너를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너와 삶을 천천히 함께 만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듣던 필립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함께 하는 동안, 어떤 순간에는 나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필립이 나에게 사랑에 빠지고 있다는 걸.

다른 건 몰라도 그 눈빛 하나는 절대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전과 다른 눈으로 나를 봤다.

헤어질 날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을 알면서 우리는 둘 다 그 감정에 그냥 우리의 몸을 던졌다.



그렇게 당연히 우리 둘 모두 감정이 커지고 나는 떠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그에게 약속하지 못했다.

아직 나도 모르니까...





그래도 날 만나고 싶냐는 고백을 한 날 이후로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필립과 보내는 1분 1초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그는 나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데이트 중 가끔 내가 앞서 걸어 나가면, 그는 내가 저렇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와의 데이트 후 내가 집으로 잠시 돌아가는 때면, 저 뒷모습이 나를 보는 마지막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출국 직전까지도 내가 잠시 뭘 사러 나갔다 온다고 하면,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거냐고 조심스럽게 묻고는 했다.

그에게 나는 모르는 남자와의 첫 데이트를 위해 한국에서 일본까지 '충동적으로' 날아올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나에게 그 자신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몸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다른 누군가에게 갑자기 훅 빠져서 또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게 오해라는 걸 나는 안다.

그가 나에게 처음부터 특별했다는 걸, 마지막 2주 동안은 다른 남자를 그냥 안 만난 게 아니라, 만날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다는 걸 필립은 온전하게 믿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너를 좋아해. 넌 나에게 특별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내 행동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되지 않으려고 선을 그었고,

그를 만나면서도 이탈리아에서 날 보고 싶다는 남자 둘을 오라고 허락했고,

그를 만나는 첫 2주간은 다른 남자와도 만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는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믿지 못했던 것 같다.


일부일처 관계와 가벼운 관계에 대한 그의 이미지도 나의 오해일까?

아니면 그가 마지막까지도 나의 진심을 온전히 믿지 못한 건, 자신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서일까?




근본적으로 관계에 대한 생각이 나와 다른 사람과 나는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일본에서 돌아와서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질 것 같을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을 아직 몰라.'

어떤 사람이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선 2년간의 대화도, 8시간의 만남도 충분하지 않아.

나는 그 사람이 어떻게 화를 내는지, 어떻게 화를 푸는지, 가족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친구들 앞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활 습관과 경제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가치관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



지금 필립은 자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나를 소개한다.

우리가 함께 한 사진들을 보여주고, 함께 한 이야기들을 말해준다.

나는 그의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그의 부모님과 형을 만났고,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그를 서운하게 하고, 그가 나를 화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싸우기도 했고, 화해하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떻게 화를 내는지, 어떻게 화를 푸는지, 가족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친구들 앞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활 습관과 경제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가치관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필립은 좋은 사람이다.

똑똑하고, 따뜻하고, 좋아하는 여성에게 친절이 몸에 밴 사람이다.

오래된 기사도 정신 같은 게 남아서,

자기를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도 항상 차 문을 열어주고, 계단에서는 내 뒤에서 걷고, 차도 근처에 걷지 못하게 하고, 길을 걸을 때마다 보이는 꽃을 꺾어준다. 어떤 꽃인지 굳이 자세히 설명하는 너드미를 보이면서. 먹을 수 있는 꽃이면 입에 넣어주면서..ㅎㅎ

나는 내가 아픈지도 몰랐는데, 밤새 식은땀이 난 걸 보고 아침에 먼저 일찍 일어나 따뜻한 차와 약을 준비해 놓는다.

덕분에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관계에 대한 깊은 대화를 할 때, 혹은 그의 집을 둘러볼 때 나는 가끔 생각했다.

우리 둘이 너무 다른가?

필립은 정말 많은 여자를 만나본 사람이다.

아마 필립은 더 명확히 알겠지, 내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만나본 많은 여자들 중 나는 어떤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고, 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얼마큼 특별하거나 평범한지도 잘 알겠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만큼이나 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첫 데이트 이후로 이어질 만큼 마음에 든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두 번째 데이트 기회를 줄 정도의 인내조차 나는 대부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내 눈앞은 희미한 상태이다.

내 마음은 확실한데, 그것만으로 충분한지 알 수 없는 상태.

필립이 가장 부러울 때가 그때이다.

아마 필립은 그걸 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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