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도? 깊이? 중요하긴 할까?
우린 이제 공식적으로 "롱디"가 되었다.
롱디 커플이라기엔 내가 헤어지기 마지막까지 여친/남친이 되기를 거부했고, 필립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했으니 롱디 커플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정말 이어지기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연락을 이어나갈 이유도, 의무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 사이에 있는 감정과, 한 달간의 시간의 의미와, 서로가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믿음만으로 이어나가야 하는 인연이다.
누가 하나 연락이 끊어진다면, 속상하긴 하겠지만,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둘 모두 어떤 약속을 하지 않고 저렇게 한발 빼는 행동을 했던 것은 그런 자유를 조금은 가지고 싶기도 했고, 반드시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헤어지자마자 매일 연락을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몇 시간 동안 답장이 없으면 필립은 걱정을 했다.
프라하에 있는 동안 나는 답장을 빨리 했었으니까.
나도 그랬다.
하지만 매일같이 연락을 한다는 것은 가족 사이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지금까지 연락의 빈도에 대해 주시하고 지켜보니,
같이 살고 있지 않은 두 사람이 연락을 매일 하려면
정말 서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커플이 롱디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약속을 해야만 가능한 것 같다.
부부도 절친도 그러긴 어렵다.
서로 약속을 하고 의무를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나는 평소 연락을 잘 받거나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문자를 하면 3일 후에 답장을 하기 일쑤였고, 친구는 "야, 3일은 너무한 거 아니냐?"라고 핀잔을 줘서 고쳐보려고 해도 잘 안되어서 결국 친구들이 나의 패턴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익숙해지게 됐다.
내 생각이 바뀐 것은 몇 년 전이다.
나의 절친 중 가장 최근에 사귄 친구는 나의 학생이었다.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어린 친구고, 원래 대면 수업을 하다가 친구가 취직을 하게 되면서 시간이 애매해 전화 수업으로 바꾸게 되었다.
우리는 몇 달간 주 3회, 하루 30분씩 통화를 했다.
게다가 영어를 잘 못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대단히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 어땠는지, 지난 며칠간 뭐 했는지, 주말에는 뭐 했는지, 그야말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했다.
그 누구와도 그렇게 자주, 정해진 시간 연락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돈을 줬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했던 통화였다.
그런데, 통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학생이었는데, 그렇게 몇 달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커졌다.
나는 이 친구를 정말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 친구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며, 절친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이고, 만날 때마다 너무 재미있다.
이렇게 마음이 커진 건 몇 달간 정기적으로 이어진 시시콜콜한 이야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별 특별한 것 없는, 일상적이고, 지루한 이야기들.
그중 가끔은 속상한 일, 기쁜 일이 생길텐데, 당연하다는 듯 그걸 이 사람과 나누는 일들.
몇 달간의 통화 수업 후 언젠가 친구에게 "너와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해 설명해 줘. 몇 명이고, 어떤 사람들인지."라는 질문을 영어로 했다.
영어 수업용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답을 잊을 수 없다.
"일단, 네가 나의 베프지."
"......"
그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 통화를 어디에 어떻게 서서 했고, 무엇을 바라보며 그 말을 들었는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로 기억한다.
아마 평생 갈 기억이 될 것이다.
나 혼자 친구라고 생각한 줄 알았는데...
학생한테 느끼면 안 되는 감정인 것 같아서 말 못 하고 있었는데,
상호적인 감정이었다니...
진짜 고백을 받은 듯 심장이 뛰고 설렜다.
"정말이야? 나도 네가 내 베프라고 생각해! 세상에,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너무 행복하다."라며 정말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우린 그 이후부터 수업을 멈추고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친구한테 돈을 받으며 수업하기 좀 미안했고, 그 친구도 일이 바빠져서.
물론 우리 케미가 잘 맞아서 친구가 된 것이겠지만,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가득 찬 꾸준한 연락은 큰 힘을 발휘했다.
그 통화가 아니었다면, 우린 절대 그런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필립도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연락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냐면,
"오늘 12시까지 가면 될까?"라고 문자를 했다면,
답장을 안 한다.
왜 답장이 없냐고 물으면, "12시까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아니, 알겠다고 얘기를 해줘야 가지, 그게 아니면 그 시간이 괜찮은 줄 내가 어떻게 알 일이냐고.
하지만 필립은 그런 부분을 넘겨짚고 답장을 안 한다.
그런 자신의 성향 때문에 데이트할 때 문제가 많았는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문자로 대화하는 걸 싫어한다."라고.
자신은 그런 사람이라고 미리 얘기해 두듯이. 알아두라는 듯이.
그렇다고 통화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필립은 만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딱 필요한 약속만 연락하고 구구절절 다른 말은 안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5월 초에 헤어지고 나서 매일 연락을 하고, 몇 시간 동안 내가 답장이 없을 때 필립이 안달 나하고 걱정했을 때 나는 놀랐다.
먼저 영상통화도 걸었고, 아침저녁마다 인사 문자도 남기려고 노력했다.
뭐여. 이럴 수 있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특히 현재 두개의 회사에서 CTO와 CEO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그는 일이 바쁘자 이전처럼 연락을 매일같이 하지 못했다.
필립과의 연락이 며칠간격으로 늘어나고, 일주일 정도로 늘어났다.
일주일을 넘긴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도 어느 날은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특히 요즘에는 필립이 일 때문에 너무 바쁘다는 걸 알아서 방해될까 봐 먼저 연락을 잘 안 하긴 했지만
6일째 되는 날이면 꼭 필립이 먼저 연락을 했다.
일주일을 보고하듯이 사진과 이야기와 함께.
나와의 연락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고마웠지만, 그런 연락을 몇 번 받고 나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와의 연락을 해야 하는 숙제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면 안되는데.
숙제는 아무리 좋아하는 과목이라도 어떨 때는 좀 귀찮고, 하기 싫어질 때가 있으니까..
필립과 내가 함께한 경험이 특별하다는 것을 안다.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없었다.
해외여행에서 한 달간의 뜨거운 연애 경험이 특별하다는 게 아니라,
그와 했던 이야기들과 다양한 경험들, 긍정과 부정의 감정 소용돌이를 거칠게 지나치고 서로에게 푹 빠지게 된 경험을 한 달 만에 진하게 한 경험이 드물었다.
필립이 친구들에게 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나는 알 수 없고, 묻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말하는 방식과 비슷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의 바다와 시차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지금 너무나 바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데이트할 시간이 없을 테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에게 너무 중요한 데다가, 오랜만에 너무 신나고 관심이 가는 일을 만나서 주 60시간 이상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하는 연락이 숙제 같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연락하고, 가볍게 안부를 묻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한번 연락했으니 이번엔 네가 먼저 연락해야지.라는 식의 구차한 계산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계산이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투자한 만큼 상대도 투자를 해야 이어갈 만한 관계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어느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를 떠난 지 두 달 반 정도가 지난 지난 7월 말, 그가 나의 영상통화를 두 번 씹고, 콜백하지 않았다.
왜 못 받았는지 간단하게 이야기만 하고.
왜 전화를 걸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나는 별 이유 없이 그냥 필립이 보고 싶어 전화하고는 했고, 이번에도 똑같은 이유라는 걸 그도 알테니 사실 생각해 보면 이유를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의 연락이 올 때면 언제나 사려 깊고 유머 가득했지만,
나에게 다정한 애칭과 키스를 날리며 보고싶다고 말하곤 했지만,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