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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의 비밀>

더 사랑해서가 아니었어.

by 예나

누군가를 짝사랑하거나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아서 괴로울 때,

그게 연예인에 대한 마음이든, 이미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든, 아니면 내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이든,

그때 나는 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린다.

정말 희한하게도, 초상화를 그리면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냥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정이 떨어지는 정도로.

마치, 한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노력과 시간에 한계점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미 내가 사랑하는 사람, 예를 들면 친구나 가족을 그릴 때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림을 완성했다고 해서 전혀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들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좋은 전략이 아직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터질 만큼 강렬한 마음이어도 사랑은 아닐 수 있으니까.


이건 우연히 알게 된 것인데,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내가 좋아하던 애가 자기를 그려달라고 하길래 그려줬다가 경험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 친구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애로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 애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부탁을 하면 그려줄 줄 알고 큰 의미 없이 부탁을 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었고, 작은 초상화 하나를 그리는데 길어야 4~5시간 정도 걸리는 일이니 나는 덥석 물었다.

그런데 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 그 애를 좋아하는 마음이 정말 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참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그 초상화를 그에게 주었고, 내 식은 마음도 같이 전달이 되었는지 이후 나에게 이상하게 매달려서 그 여자 친구가 나를 찾느라고 학교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나는 참 좋은 발견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나는 필요할 때마다 초상화를 그렸다.

한 번은 마음이 꽤 크다고 생각해서, 묻지도 않았지만 선물하려고 그린 적도 있었는데, 완성하고 나서 기억도 나지 않아 완성된 그림을 어디 처박아두고 몇 년을 썩힌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이 그림에는 그의 얼굴도 나오지 않았었다. 초상화도 아니었던 것.

정말 실패 없이 잘 드는 방법이다.


필립에게 그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이 커져서 상황이 복잡해져도, 나에게는 방법이 다 있다고.

그러면서 나의 초상화 비법을 얘기했고 필립은 그걸 황당+신기해했다.

그런데, 내가 떠나기 전, 필립에게 어떤 선물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그림이라고, 모든 사람이 나에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고, 필립은 좋아했지만 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꼭 그리지는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말했다.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해."


당연하지만,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게, 필립에 대한 내 마음이 이전의 그림 주인들과 달리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면 마음이 식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잘 생각해 보니 그게 전혀 아니었다.


필립에 대한 내 마음이 그림을 그려준 이후에도 식지 않았던 것은, 나의 마음이 너무 커서도, 내가 그를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마음의 크기가 문제였다면, 수십 장을 그려서 그 크기를 맞추면 천천히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정답은 상호성이었다.

이전의 그림들이 먹혔던 것은, 나의 감정이 상호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쓸 수 있는 시간과 노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 주지도, 심지어 나를 제대로 바라봐주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과 노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친구와 가족에게는 그림이 먹히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이 더 커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미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기꺼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내 방에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초등학생 때, 성당에서 랜덤으로 뽑은 포춘쿠키 같은 것에 들어있던 말이었다.

이사를 하면서도 나는 그 종이를 지금까지 간직했다.

후회 없는 삶이라니.. 그만한 삶이 또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할 때 항상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자 한다.

정말 좋아해주고, 그걸 그에게 항상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떠나야 할 때, 나는 미련이 없다.

완벽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최선을 다 했으니까.


필립에게 그림을 그려줬는데도 내 마음이 식지 않았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이 너무 명백하고 명확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상황 때문에 숨기거나 줄여보려 했다면, 그게 무색할 정도로 선명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 나는 기꺼이 나의 시간과 노력을 쓸 수 있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만약 거리와 시간이 그의 마음을 먼저 바꾼다고 해도 나에게 남은 하나의 방법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언제나처럼 잘 먹힐 것이고, 나는 미련 없이 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그를 그릴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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