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짜증날만 한 거 맞죠?>

아닌가...?

by 예나

필립은 문자나 연락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 확실한 것 같다.

내가 연락을 하면 답장은 바로 오지만, 먼저 연락을 하는 건 며칠에 한번 정도이다.

그것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우리 정도의 사이일 때 일주일 정도의 텀을 두고 연락하는 게 불안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도 일 년에 많으면 두세 번 연락한다.

나도 연락을 잘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연락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특히나 지금 일이 많이 바쁜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락을 할 때만큼은 대화에 어떤 깊이가 있었으면 했다.

특히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 그렇다.

그는 만났을 때 나에게 100% 이상의 집중을 해주는 사람이었고, 자기 일을 하면서도 내가 외롭지 않게 끊임없이 사랑과 관심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프라하에 있을 때는 연락 스타일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지만, 만날 수 없는 상황이면 이런 연락 스타일이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대단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적어도 대화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의 하루 공유, 너의 하루 공유, 끝.

이런 식이 아니라, 주고받는 대화를 원했다.

필립이 많이 바빠지고 나서, 최근에 그것조차 어려웠던 시점이 있었다.



-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게 되면 꼭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는 아직까지 데이트를 하러 간다는 문자를 한 적이 없다.

나는 그와 헤어진 후 두 번 데이트를 했고, 그중 하나는 내가 갑자기 아파서 취소했다.

두 번 다 솔직하게 얘기했고, 필립이 티를 많이 내지는 않지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바다와 문자 건너서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프라하에서 함께 했을 때, 내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가 있는 날이면 우울해하고 힘들어하던 그의 모습을 나는 비에 젖은 개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면 그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더라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속 1순위는 필립인 것이 변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가벼운 데이트 한 번이 그걸 위협할 일은 없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굳이 그걸 알아서 뭐 하겠냐고, 알면 서로 힘들지 않겠냐고 했다.

그런데, 자기는 궁금해서 미치겠다며, 힘들어도 알고 싶다고 졸라서 그의 제안으로 했던 약속이었다.

모르는 걸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 결론으로 나아가기까지 그는 "나는 너의 데이트 정도는 쿨한 사람이지만 궁금증 때문이다."라는 식의 어필을 하기 위해 애썼다.

나는 그게 귀여우면서도 좀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에게 나는 말하기로 했고, 적어도 나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나만 모르면 또 그건 불공평한 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에게 말하기로 한 것이다.

나의 두 번째 데이트가 취소되었을 때 문자 너머에서도 필립이 신난 게 느껴졌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지금 많이 바쁜 필립을 내 데이트 소식으로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의 결과, 필립과의 관계를 우선시하기 위한 나의 결론은 데이트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필립이 바쁜 게 좀 나아져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할 정도가 될 때까지는...

데이트하게 되면 말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헤어진 지 3달이 지났지만 필립은 한 번도 데이트를 나가지 않았고, 나는 초반에 그 두 번을 제외하고는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프라하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일에 집중했다.


친구는 내 말을 듣고 내가 순진해 빠진 바보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비웃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백 퍼센트 확신하는데, 무조건 필립은 데이트하고도 너한테 말 안 할 거야. 왜 그러겠어. 네가 질투하는 사람인 것도 알고, 힘들어할 것도 아는데."

내가 알게 되면 관계가 오히려 틀어질 것 같으니 그가 말을 안 할 것이라고 친구는 확신했다.

그리고, 나에게 추가로 이렇게 조언했다.

"너도 데이트 나가, 그냥. 그러고 말하지 마. 무슨 상관이야. 가볍게 만나는 건데. 프라하 가서 필립 다시 만나면 그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지. 다 솔직하게 말하지 마."

나는 그때 필립을 대변했다.

"아니야. 나는 필립을 믿어. 그냥 좋은 사람이라서 믿는 게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라는 걸 믿어. 나한테 그랬어. 자기는 제일 싫은 게 거짓말(bullshit)이라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참을 수 없다고. 게다가 나한테 거짓말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나 기분 좋으라고 다른 사람 안 만나겠다고 거짓말로 약속할 수도 있었잖아. 어차피 바쁘다는데, 내가 지 데이트하는지 아닌지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바쁘다는 것도, 데이트 없다는 것도, 안 믿기 시작하면 거짓말일 수 있는 건 너무 많아. 그냥 나는 필립을 믿기로 했어. 그 정도는 믿을 수 있어."

"겨우" 한 달을 만난 사람에게 "그 정도의" 믿음을 보이는 나를 끝까지 친구는 한심해(?)했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어서 그 마음을 이해는 했지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불신을 조언하는 친구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아는 친구 중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 정도의 거짓말이 우리 사이에도 필요한 걸까?

모든 관계에 필요한 걸까?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런 배신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약속을 생각하면, 데이트를 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은 배신이다.

그런데 3개월을 데이트한다는 말 없이 지내다 보니, 오히려 지금 와서 데이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초반보다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자로 전해야 하는 소식, 그것도 3개월 동안 서로의 몸을 만질 수 없는 시간을 보낸 후.

"정말 이 사람이 날 떠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데이트 소식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면, 나도 말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정도 시간이 지나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내가 데이트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필립이 이전만큼 힘들어할까?

덜 신경 쓰이진 않을까?

많이 바쁘고, 시간도 좀 지났으니까...

그것도 나는 무서웠다.


하지만 우리의 약속을 잊을 수는 없다.

필립은 약속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이건 나에게 했던 몇 개 안 되는 약속이다.

우리 둘 다 그걸 무겁게 생각하고 지켜야 한다.

-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밤, 프라하에서 딱 두 번 데이트했던 이탈리아 연하남이 나에게 자기 누드사진을 말도 없이 보냈다.

소위, "unsolicited DP"를 보낸 것이다.

"네가 가질 수도 있었는데 놓친 것"이라는 태그와 함께;;

"숨기려 해도 네가 날 좋아하는 거 알아."라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그에게 이런 거 허락 없이 여자한테 보내지 말라고, 비호감인 데다가 이건 성범죄라고 말하고는 바로 그를 차단했다.

그리고 이 불쾌한 경험을 필립에게 조잘조잘 일러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걔한테 키스해주지 말걸 그랬어. 얘는 그것 때문에 내가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해. 어떻게 그런 망상을 할 수가 있지?"

그랬더니 필립이 말했다.

"아, 왜... 일하는데 네가 왠 이탈리아 남자랑 키스하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계속 돌아다니게 하네!"

나는

"필립, 왜 그래 ㅎㅎ 얘랑 키스했던 날 너한테 다 말했었잖아. 거절하고 헤어지기 전 겁나 조르길래 굿바이 키스 한번 해줬다고."

라고 말하며 그때 내가 필립에게 그 말을 했던 옛날 문자를 다시 보여줬다.

필립은 내가 다른 사람을 말하는 줄 알았다며 살짝 민망해했다.

나는 3개월 동안 나를 보지 못한 그가 아직도 나에게 이런 질투심을 느끼는 것이 괜히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지금의 일도 아니고 과거의 일인데.

그래서 쪼끔 감동했고, 내가 한번 더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내가 마음을 여니, 기대가 커졌다.


그러니 마지막 영상통화를 거절당했을 때, 나는 화가 났다.

그냥 거절이 아니고, 콜백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마지막으로 영상통화를 한 이유는 그의 문자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일주일 보고(?)를 하면서 그는 지난주는 좀 힘들었다며 있었던 일들을 쭉 나열했다.

대부분 조금 짜증 나는 일들 정도였지만, 그중 두 개는 꽤 큰 일 같았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나는 답장을 하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 질문에 대해 하루 동안 답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통화를 걸었다.

그가 일이 끝나고 저녁도 먹었을 때쯤, 여기 시간으로는 새벽 3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그는 답하지 않았고, 지금 부모님과 부모님 친구들을 만나고 있어서 통화가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콜백을 하지 않았고, 이틀 전 "무슨 일이냐"라고 보낸 내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

내가 답장을 하지 않으니 평소 하던 대로 그가 애교를 부렸다.

내가 짜증이 난 것 같으면, 나와의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내가 생각나는 일이 있을 때 그걸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내는 식의 애교다.

하지만 내 짜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조금 더 깊은 화로 번졌다.

나는 다시 한번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그에 대한 답장 없이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건 대화도 소통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 할 말을 던져놓고, 나를 걱정하게 하고는 내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그냥 다시 자기 할 말만 한 셈이다.

그게 아무리 애교라도 귀엽지 않았다.

그의 애교 섞인 문자에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나의 질문에 답하기를 나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채팅창을 열면 아직도 나의 질문이 바로 보이는 상황이었으니까.

며칠이 지나도 답장이 없자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담은 세상에서 제일 긴(?)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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