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생식에 대한 괜한 집착

2. 종교의 핵심

by 예나
“신앙은 축복이고 아쉽지만 그 축복은 나를 찾아온 적이 없다.”

신자들의 혹시 모를 적대감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믿음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내가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신앙의 기회를 줬던 것은 전도부에 들어갔을 때다. 다른 것보다 미사 중에 신부님이 들어가는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어쨌든, 어쩌면 나에게 찾아올 ‘신앙의 축복’을 위해 나는 진정으로 열린 마음으로 갔다. 몇 주간 준비를 마치고 첫 미사 진행 기회가 왔다. 나의 역할은 간단했다. 신부님의 교리 시간이 끝나면 세 가지 기도를 하는데 그중 하나를 마이크 앞에서 읽는 것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미사 직전까지 대충 훑어보기만 했던 기도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문에서 에덴동산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마이크 앞에서 풉, 하고 웃고 말았다. 그렇게 수백 명의 신도 앞에서 나는 내 믿음의 부족을 적나라하게 증명했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기도를 마쳤다. 내가 거의 쓰러지듯 문 안으로 들어가자 언니 오빠들은 “대박사건. 막내가 크은-일 냈다.” 하며 난리가 났다. 기도문을 쓴 오빠는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려 자신이 잘못 쓴 거라며 그렇게나 미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기도문이 웃겼을 뿐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신부님은 미사가 끝나고 들어와 나를 보고 웃으시며 내 어깨를 툭 치고 들어가셨다. 나는 그날 이후로 전도부에 돌아가지 않았다. 나에게 신앙의 축복이 올 일은 없는 것이 명백했다.




지난 수천 년간 종교는 '진리'에 있어서 우위를 독점해왔다. 그들의 "진리"는 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 옷을 입고 있었다. 진리에 대한 명료함 자체가 그들의 힘이었기 때문에 종교는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그 입장을 흐리게 하는 어떤 것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종교는 진리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입과 손과 생각을 막고, 책을 태우고,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였다. 크고 작은 전쟁에서 많이 이긴 몇몇 종교가 지금까지 우리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신자들 뿐 아니라 비신자나 무신론자에게도 과학적 사고가 종교적 사고보다 훨씬 더 어렵다. 내 생각에 그들의 가장 큰 성공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겨우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과학이 자신들의 진리를 사각사각 깎아낸다. 수천 년간 지켜온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 같아 종교 입장에선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종교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내 생각에 과학은 종교가 아님이 분명하고, 종교의 적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착각이 많다. 비신자들 중에도 과학을 종교를 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둘 사이에 분명 긴장이 있긴 하지만 현실은, 과학은 종교가 가진 자리를 빼앗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의 공존은 서로 다른 두 종교의 공존보다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본질을 고민해볼수록 이에 확신이 든다. 오히려 어쩌면 과학이 물과 기름에게 비누가 그런 것처럼 서로 다른 종교들 간의 갈등을 줄여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종교의 조건

내가 적으려는 건 사전적, 학문적 의미보다는 현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종교가 가지는 의미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조건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 중 반 이상의 일신교 신자들이 종교에 신 또는 신성성이 필수적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 교리

경전에는 교리와 교리에 힘을 실어주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언뜻 이야기가 엄청 중요한 듯한데 막상 신자들이 표면적으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보다는 교리였다. 그 교리는 주로 어떤 형태로든 불멸성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불멸을 위한 삶의 방식을 말했다. 그들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분명하지만 나와의 대화 중 그에 대한 말은 굳이 길게 하지 않았고, 나에게 그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많은 독실한 신자들은 '예언자들'이 말한 교리에 대한 것으로 빠르게 주제를 옮겼다. "신은 몰라도 예수의 처녀 잉태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나에게 신자들은 그러면 교회 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괜찮으니 일단 한번 와서 예수의 말씀이 무엇인지 들어보라."라고 한다.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핵심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자들은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주 말했고, 현재 우리 지구의 상황이 어떻고(악의 유혹에 지고 있다는 것, 현대에 와서 종교가 힘을 잃은 것에 대한 말인 듯하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이 위기를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에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종교에선 교리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2. 의식(초자연적 힘의 작용을 위한 주술적 행위, 의식을 공유하는 사회/집단)

대화를 해보니 의식이 종교에 참 중요한 것 같다. 내가 만난 많은 기독교 신자들 중 교회를 일부러 나가지 않는 신자는 거의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기 귀찮아하는 것을 말하며 당장 교리가 귀에 들리지 않아도 교회에 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걱정했다. 성당의 경우 미사 마지막 성체를 모시는 의식이 중요하다.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종교적 의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방식에 있어서 예배라는 틀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누구는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모여서 성경을 읽고, 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교회를 나가기보다 학교 동아리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의식을 행하면서도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의식을 전혀 행하지 않는 신자는 없었다. 다만 나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거나 식전 기도를 하고,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묵주나 염주를 착용하는 것도 의식으로 본다. 종교에 있어서 믿음과 의식은 거의 동일한 정도로 중요해 보인다. 어떨 때는 의식이 더 중요해 보이기도 하니 희한하다.


3. 신자

내 생각에 믿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종교도 종교가 말하는 신도 종말을 맞는다. 믿는 사람이 없다면 경전은 그냥 두꺼운 책일 뿐이고 의식은 뭔지 모를 몸짓일 뿐이고 교리는 의미 없이 허공을 떠도는 문장들일뿐이다.




종교의 핵심

35억 년의 지구 생명 역사에서 '의미'는 겨우 수십만 년 전 인류와 함께 탄생되었다. 죽음을 알게 된 인간,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의 필멸을 인식하고, 한정된 나의 시간에 대한 예측과 함께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인간이 결국 신을 '알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오래전 그 미사 때, 내가 종교에 대해 지금과 같은 이해를 가졌다면 기도문을 읽으며 웃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도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을 배우고 나면 당황하고 우울해한다. 이것을 처음 깨달은 우리의 조상 인류는 그날 밤 어떤 마음으로 잠에 들었을까. 삶의 시간에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막 깨달은 한 인간이, 죽음 뒤에 움직임 없이 벌레와 함께 썩어가기만 할 뿐인 동료를 바라보는데 하늘은 무심하게 색을 바꾸고 소리를 지르고 무거운 비를 보내며 이 인간을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 이렇게 나는 ‘신을 아는(생각해낸)’ 최초의 생명체가 우리 인간이 된 경위에 대한 그림을 어렵지 않게 그려나갈 수 있다. 두뇌가 죽음을 인식하자마자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는 신화를 탄생시키고 마음에 신앙을 품었을 것 같다. 종교가 시작한 그 물줄기에서 인간이 느낀 두려움과 불안함의 맛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내 생각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조차도 신 없는 종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종교의 핵심이 본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의 핵심은 이야기라는 도구를 사용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이다.


과학은 본래 도덕적 당위성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이 과학의 목적도 아니고 과학으로 알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반면에 종교는 시작부터 그에 대한 다양한 답을 고민하고 제시해왔다. 종교마다 그 방법은 달라도 결국 모든 종교는 어떤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답을 내릴 판단의 기둥을 사람들에게 제안하고 설득한다. 다양한 방법들의 목적이 어차피 궁극적으로 바른 삶을 위한 '선'으로 가는 길이라면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예수가 정말 처녀생식으로 탄생했는지에 대한 부질없는 논쟁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싸움이 되어야 할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과학 혁명 이후 힘을 잃어가는 종교는 그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과학적 사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종교는 이야기가 틀렸다고 증명하는 과학 때문에 힘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니다. 쓸데없이 이야기 진위 싸움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자신들의 본성과 역할이 오해 속에 파묻히는 것을 방치함으로써 손수 그 소중한 힘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교리에 감화되기 좋게 디자인된 것일 뿐 이야기는 진리가 아니다. 종교는 이야기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악을 알아보는 눈과 그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괴물에 대한 동화를 읽어주는 것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종교는 광활한 우주 속 인간의 존재가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연쇄적 우연의 결과이기 때문에 창조를 말했고, 예수가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처녀생식 이야기를 취했을 뿐이다. 종교는 하느님이 며칠 만에 세상을 창조하고 처녀인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자신들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과학은 절대 할 수 없는 윤리적 나침반의 역할만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종교만큼 충실히 하고자 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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