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서른하나.
3412년 5월 13일
"우리가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합시다."
겁에 질린 인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오천 년 동안 잠들어있던 전사가 답했다.
"좋은 생각이야."
"쇠사슬을 풀어줄 테니 우리를 가만히 두시오. 누가 다칠 필요는 없지 않소. 당신은 이 기지를 그냥 떠나는 거요. 다른 동료도 부르지 말고 그냥 조용히 떠나 주시오. 대신 우리는 땅을 파는 것을 멈추겠소. 당신 동료들이 깨어나서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기 전까진 말이오. 지구는 우리에게 맡기시오."
"유리한 입장이라더니 강도짓을 하는군."
"지구의 주인은 우리란 말이오!"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전부터 우리는 이 행성 지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쳐들어왔다느니 주인이라느니 멍청해도 오만할 수는 있나 보군."
"그렇다면... 당신의 조건은 무엇이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너희들이 이곳저곳 쑤셔대 망가진 지하 땅을 버리고 올라올 것이다. 지상의 50%를 우리 종족과 공유하는 것으로 한다."
"그건...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이오! 지상땅은 이미 인간으로 가득 찼단 말이오!"
"미개한 것들. 우리는 물 안에서 살 수 있는 기술이 있다. 바다를 우리에게 넘겨라."
"바다도 주인이 있소."
"그건 누가 정했지?"
"오랜 선조들이 협상을 통해 나눈 것이오."
"그놈의 협상 참 좋아하는군. 우리가 사는 땅을 모두 헤집어놓고 협상 운운하는 꼴을 보면 나의 동료들이 재미있어하겠어."
...
"어떤 바다를 줄 것인지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결정하도록 하라. 1년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 나의 120억 동료와 함께."
인간은 1년 동안 120억의 생소한 전사를 이겨낼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바다의 절반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했다. 더 이상의 협상은 어려웠으나 전사들이 공격 협박을 시작하면 약속한 지상의 절반을 채우기 위해 바다의 20%를 더 주기로 한다. 이는 만약의 사태를 위한 특수 대비책으로 인류의 0.000001%에게만 공유된 정보였다.
1년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3413년 5월 13일
인류는 긴장상태로 잠들어있던 전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온 하늘에 먹구름이 피고 다섯 개의 대양에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쳤다. 인간은 겁에 질려 이날 하루는 어떤 다른 일도 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솟구치던 물기둥이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전사가 오지 않은 이유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 의견을 쏟아냈다.
"잠에서 깨지 못한 것이겠죠. 인간을 만만하게 보더니 결국 늦잠덕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군요.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그들의 과오로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정치인이 말했다.
"1년 전 우리는 그 전사가 모르게 몸을 스캔해 놨습니다. 젊고 건장한 척했지만 그의 몸은 많이 늙어있었습니다. 마지막 힘을 내어 깬 후 다시 잠들었지만, 그는 곧 죽어 다른 전사들이 협상에 대해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자가 말했다.
"우리가 지구 표면을 극도로 망가뜨려놓은 탓에 살지 못하겠다 결론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환경주의자가 말했다.
3413년 6월 15일
인간은 금세 1년쯤 전 깊은 땅굴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깨어난 전사"와의 만남을 잊었다.
그날 저녁, 해 끝이 수평선을 만나는 순간 강도 9의 강한 지진이 지구 표면의 온갖 마른땅을 산산조각 낸다. 다시 물기둥이 솟구치고 120억 전사들이 물기둥 사이로 쏟아져 나온다.
"인간이라는 더러운 종족, 정말 우리의 행성 표면에서 편히 살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하늘을 날아오르는 분노한 전사들의 입김에 대륙 위의 모든 인간들이 순식간에 불타오른다.
다 살아버린 노인들, 어리고 둥근 눈들, 그 사이의 모든 숨들, 어떤 차별도 없이
인간은 비명을 한번 지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