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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는 나만의 세계

완전 투명하지 않은 소통의 행복

by 예나

내가 결혼할 사람이 외국인이라고 할 때 한국인과의 결혼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이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이점 덕분에 더 나은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서로 다른 언어이다.

모국어가 다르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이 불완전성이 표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 안타까움이 우리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할 것이다.


싸움이 일어날 때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그 싸움이 금방 해결되지 않고 커질 때는 많은 경우 소통 중 발생하는 사소한 말실수나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데, 외국인과 결혼한다면 아무리 서로의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언제나 관계의 보루로 언어 소통의 불완전성이 남을 것이다.

'나를 만나기 전 너의 세계와 문화가 견고하게 존재하고, 나는 그걸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그게 안타깝고 겁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나를 미워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라고 생각하기 더 쉽지 않을까. 언어 소통의 불완전성이 뚜렷한 덕분에 "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어."가 훨씬 더 믿기 쉬워질 테니까. 그 사람이 태어나서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했던 수백일의 옹알이 이후 드디어 꺼냈던 첫 말이 나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수천 년간 익어온 생소한 언어라는 것이 그 변명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말이 다른 게 아니라 문화차이일 뿐이라는 합리화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나는 어차피 평생을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말들 사이 좁은 틈에 끼어있는 뉘앙스를 오해했을 뿐이라는 그의 변명을 아마 나는 믿을 것이다. 그 믿음이 관계를 더 건강하게 할 것이다.

믿음이 용서로 발전한다. 용서는 보통 주고받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한번 더 용서하면 보통 상대도 나를 한번 더 용서한다.


생각해 보면 같은 언어를 쓰는 문화권에 자란 사람들도 서로의 경험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상황은 한국인과의 관계에서도 충분히 같은 방식으로 풀 수 있다. 서로의 선의를 한 번만 더 믿어주는 용기를 낸다면.(폭력이 없다는 전제하에) 하지만 한국인끼리 언어 소통 문제는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서 이런 싸움은 타인과 교류할 때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고의로 나를 다치게 하기 위한 칼로 느껴진다. '쟤가 저런 말하는 거 이런 의도로 느껴지네.'라고 상대의 의도를 어름 잡아 오해를 키운다.


요즘 유행하는 '예쁘게 말하기'를 배운 사람이 너무나 적다. 가르치기 어려운 것인데 심지어 잘 가르치지도 않으니까. 예쁘게 말하기는 말보다 존중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존중의 허들이 너무 높다. 같은 인간이라면 그냥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요즘 타인에게 존중을 건네려면 인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수준과 행동과 가치관이 나와 어느 정도 같아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나의 마음에 천 개의 방이 있다면 그중 다섯 개의 문에 대한 열쇠만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내 인생에서 만날 수천 명의 사람 중에서도 많지 않다.

나를 모두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마음의 크기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내가 아무리 보여주고 싶어도 상대방이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아마 대부분의 방은 나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한 아흔 개 정도의 중요한 열쇠를 가진 사람이라면 나는 그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생긴다면 그 사람이 나머지 구백십 개의 닫힌 방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이 가진 열쇠를 소중히 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 열쇠 꾸러미는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조합일 것이고, 그 열쇠 꾸러미를 이용해서 나를 다른 누구보다 온전히, 더 깊게 사랑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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