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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an 31. 2023

백수로 한 달 살기 epilogue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시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만, 쉬고 있을 때는 그 시간이 유독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우리의 프로젝트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연말 연초를 다 보내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오고야 말았다. 




새롭진 않지만 특별한 날


지난 회고에서 "난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나 생각이 많이 변했음을 느껴 빨리 이 마음을 공유하고 싶다."라고 남겼었는데, 그래서인지 마지막 만남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 날의 기억을 조금 더 더듬어보려고 한다.



· 집을 나서기 전, 첫날 작성했던 똑같은 질문지의 답을 채워나갔는데 첫날과는 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 나에 대한 정의를 이전보다 쉽게 내릴 수 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 나 스스로 한 약속이기는 한데,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는 무조건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까지 완성하기로 했었다. 멤버들을 만나기 전, 남는 시간 동안 극강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포트폴리오의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 날 브런치 작가 통과 메일을 받았다. 한 번에 패스된 것도 놀랍긴 했는데 프로젝트 마무리 순간에 또 하나의 성과를 남길 수 있게 되어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 프로젝트의 리더 언니를 먼저 만나 약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매주 진행하며 남겨놨던 느낀 점들을 공유하기도 했고 개인적인 생각의 성장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눴다. 그리고 책 이야기를 하다 역사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의 폭을 넓히기도 했고, 완성한 포트폴리오도 공개했는데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 마무리는 역시 고기였다. 지도 찾아 들어간 고깃집이 맛있어서 너무 좋았고, 게다가 반주를 곁들이니 말해 뭐 해! 다양한 회사,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랜만에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달까? 다음엔 백수 모임이 아닌 직무 모임으로, 아니 그냥 좋은 인연으로 계속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프로젝트를 돌아보며


지나온 커리어나 앞으로의 커리어 고민들에 대해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픈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커리어라는 것은 곧 내가 살아온 역사이기도 하고, 지금의 나를 대변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잘 말하지 못하는 주제 중 하나인데 백수라는 타이틀에 엮여 만나게 된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오픈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오히려 접점이 하나도 없어서 더 쉬웠던 것일까? 쉽게 정의되는 관계와 상황들은 아니지만 결론은 참 좋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면의 힘을 많이 기른 것 같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생각하는 방향성도 좀 더 넓어졌다고 본다. 자기 객관화에 따른 자기 확신, 부족한 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해온 것은 가치절하 하지 않는 것. 나는 스스로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 물론 직접 입 밖에 내는 연습도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어떤 일에 부딪쳐도, 누군가에게 내 커리어를 말할 때에도 최소한 주눅은 안 들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일에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모든 것이 거창하게 느껴진다. 무언가 결과물을 남겨야 할 것 같고 그게 눈에 보이는 큰 성과여야 성공한 프로젝트로 평가를 받곤 한다. 나와 그리고 세 명의 멤버가 지나온 시간들에도 나름 프로젝트라는 명칭을 붙였고, 누군가는 이걸 '시도' 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처음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이었고,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뭔가 명확한 길을 제시받을 거란 기대도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냥 매일을 꾸준하게 살아온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아주 여유있는 시간들을 마음 편하게 보내며 매일 해야 할 것을 찾은 것도 나고 실행한 것도 나였다. 그 매일을 꾸준하게 보내고자 했던 시간들이 모여 지금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나름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미션은 받았지만, 그 내용들은 평가받는 것도 아닌 주제들이었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계획을 해줬다거나 답을 알려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질문으로 받고, 그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깊이 있는 생각의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득 운전연수를 받을 때 선생님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 선생님, 저 지금 브레이크 잘 밟고 있나요? 선생님이랑 할 때는 브레이크도 잡아주시고, 그래서 잘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혼자 운전할 때 이만큼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많은 분들이 제가 브레이크를 잡아준다고 생각하는데, 전 한 번도 브레이크를 대신 밟아준 적이 없어요. 오히려 엑셀을 안 밟고 브레이크를 너무, 자주 밟는 경향들이 있어서 브레이크를 떼어주려고 이 스틱을 사용하는 거예요. 



발 떼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혼자 세게 밟고 있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연습을 하는 것. 이번 프로젝트가 딱 이런 느낌이었다. 스스로 제한해 둔 것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 결국 모든 것은 혼자 정리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니 저절로 움직이는 이치랄까.


사람은 보통 확신이 없고 불안한 마음이 클 때, 멘토링을 찾게 되고 컨설팅을 찾으면서 해답을 은연 중에 기대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도 명확하게 답을 줄 수 없는 영역이 '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고, 설사 답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 해답은 아닐 것이다. 해답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그러면서도 혼자 해내는 것은 또 쉽지 않은 모순적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에,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아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나도 만약 이걸 스스로 설계해서 해내야 했다면 혼자만의 사고에 갇혀 금방 포기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생각하는 관점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생각의 범위를 넓혀가며 내게도 적용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하되, 혼자 하지 않았던 이 프로젝트가 여러모로 깊은 의미를 남겨준 것 같다. 나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고, 순간 순간 마주하는 두려움이나 막막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엑셀을 밟아 나가보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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