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아저씨, 그거 성범죄거든요? (1)
지난 이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가 일하던 회사의 보스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사람이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닌’ 정도에서 ‘나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남반구의 이 작은 도시에서는 월급 대신 주급이나 2 주급이 좀 더 일상적인 형태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2주마다 급여가 나오는 2주급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2 주급은 돈 관리에 아주 좋은 형태인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돈 관리를 엄청 잘해서 많이 모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제목과 다르게 왜 2 주급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느냐고? 왜냐하면, 오늘이 내가 2 주급을 마지막으로 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2주 전 퇴사했으나, 마지막 급여는 오늘 들어온다. 지난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보스는 불안정한 비자를 이용해 고급 인력을 아주 싸게 착취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두 번째 무기는 급여였다. 다른 회사에서 워크 비자를 지원받고 이직하기로 한 직원이라던가 비자에 문제가 없는 직원들, 아니면 나처럼 비자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급여 지급 제한을 무기로 삼았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급여를 안 주려고 한 썰’을 풀어 볼 것이다.
무튼, 오늘 나는 마지막 급여가 들어올 예정이다. 이 글은 급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쓰고 있다. 계좌에 돈이 제대로 찍힌 뒤, 나는 이 글을 올릴 것이다.
보스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아들과 대화가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영어권 국가에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최종 결정권자로 있다 보니, 그가 계약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서명’들로 골머리를 앓는 일이 많았다. 이미 계약서를 교부하고 난 뒤에서야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고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직원들이 변호사와 자주 연락을 했다.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두 업체와 갈등이 생겼고 손해 금액 역시 두 배가 되게 생겼다. 변호사도 이번에는 우리 쪽의 잘못이 크기 때문에 계약서 상에 명시된 위약금을 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보스가 어떤 사람인가, 회사 카드로 내연녀를 위한 선물을 사긴 하지만 손해는 하나도 보기 싫어하는 참된 경영인이 아닌가! 보스는 급하게 나를 자기 방으로 호출하더니, 본인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한지를 한참 연설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들어도 보스의 잘못이 명백했기 때문에 동조하지 않고 들었다.
“그러니까 니가 가서 아양 좀 떨어봐라.”
상대 업체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 끝에 내 귀에 들린 이야기가 놀라우리만큼 어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네?”
“남자들은 원래 여자 애교에 약하그든. 니가 가가 ‘좀 봐주세요~’ 하면서 팔도 잡고 애교도 피우고 하면 그쪽도 마음이 좀 안 누그러지겠나?”
당연히 나는 찾아가지도, 아양을 떨지도 않았다. 회사의 메일을 통해 ‘보스가 진심으로 이 사태에 대해 유감을 느끼고 있음. 사태 해결을 위한 내부적 논의 이후 빠른 답변을 주도록 노력하겠음’이라는 내용을 담은 공식 메일 한 통을 보냈다.
그렇게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쯤, 나는 블로그에 회사에서 찍은 사진을 하나 올렸다. 회사 로고도, 사무실 전경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모니터와 키보드, 출퇴근 시간에 대한 언급 탓인지 누군가 내가 일하는 곳이 어딘지 알 것 같다며 댓글을 남겼다. (사실 도시가 워낙 작아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본인도 예전에 이 곳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고 시작한 장문의 댓글에는 이 회사가 얼마나 엉망인지와 본인이 이 도시로 이민 와서 제일 잘한 일이 이 회사를 나온 것이라는 내용이 이어졌고, 진심으로 그 회사를 나오길 바란다는 조언으로 마무리되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조언을 남기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여느 날과 같이 보스가 화가 나서 직원들을 호출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총 여섯 명이었다. 보스, 중국인 직원 두 명, 인도 직원 한 명, 사우디아라비아 직원 한 명, 그리고 나. 그는 돌아가며 직원 한 명 한 명을 문책했는데, 보스의 실수가 너무 명백한 상황이었기에 직원들이 반박을 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용어와 함께 영어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자 보스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는지 나에게 통역을 요청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통역하여 들려주었고 그는 대로했다. 통역을 하는 사람의 얄궂은 운명이란, 각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날 것의 그대로 말을 한다는 것이다. 날것의 감정과 함께.
보스는 화를 가득 담아 거친 언행으로 문장을 던져주었고 나는 그것을 수위 조절해가며 영어로 통역해 다른 직원들에게 알려주었다. 쓰레기 같은 단어로 구성이 된 문장을 계속 듣다 보니 화가 나고 지쳤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향한 원색적인 한국어를 쏟아내는 장면을 보는 것이 화가 났고,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보스의 화가 모두 나에게 오는 것이 괴로웠다. 결국 나는 회의가 끝난 후 사무실로 내려올 때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직원들이 그 마음을 이해한다며, 달래주기 시작했다.
감정이 좀 잦아들자 초등학생 딸이 있는 엄마인 한 직원이 잠깐 바람 쐬러 가자며 나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평소에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위로를 하는 건지 좀 의아했다. 게다가 그녀는 내일이면 퇴사를 할 사람이었다. 그녀는 보스가 참 나쁘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너는 똑똑하니까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들어오기 전 회사에서 일어난 이야기와 바로 최근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들어오기 전, 네 포지션에 있던 애도 한국인이었어. 너랑 비슷한 나이 때의 여자였어. 7개월 정도 일을 했는데 하루는 보스가 불러서 갔다가 사무실에 내려와서 울더라. 무슨 일 때문에 그런지 물어보는데 대답을 안 하길래, 혹시나 싶어서 남자 직원들을 밖으로 보내고 여자 직원들끼리 이야기를 했어. 아니나 다를까, 보스가 걔 팔을 잡았대. 그 뒤로는...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겠지? 더 심해지기 전에 뿌리치고 나왔대. 이전부터 자꾸 다른 직원들이 없을 때 자기를 불러서 이상한 말을 하더래. 그러더니 그날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만 거야.”
“그 뒤로는 어떻게 됐어?”
“걔는 그날로 일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갔어. 똑똑한 애니까 더 큰일이 생기기 전에 그만둔 거지. 계속 있으면 동의하는 걸로 오해할까 봐.”
“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한국으로 갔어?”
“응. 그리고 그 애 이전에 있던 사람이랑은 아직도 법정에서 공방 중이야. 그 사람의 남자 친구가 보스를 찾아가서 행패를 놓는 바람에 지저분하게 얽혀있어.”
“세상에.......”
“너는 똑똑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영어도 잘해. 그러니까 얼른 이 일을 그만두고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해.”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천만에. 난 그저 네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이 대화를 하고 정확히 5주 뒤, 나는 사무실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에 부들부들 떨며 리자인 레터(resign letter_사직서)를 썼다. 그리고 그 말은 5주 뒤에 나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