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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dy Jun 12. 2018

폭력에 맞서는 그녀만의 방식

영화 '엘르(Elle)' 리뷰

사람이 가장 무력해지는 순간은, 폭력에 익숙해져 버린 스스로를 발견할 때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마따나, 우리는 삶의 수많은 순간 속에서 괴물과 마주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를 분노케 했던 폭력과의 첫 조우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나 자신조차도 그 안에서 스스로를 놓아버린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혹은 무엇을 내가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할 만큼 폭력에 오랜 시간 노출된다면.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힘들어질 만큼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괴물과 맞서는 쪽을 택할 수 있을까. 영화 '엘르(Elle)'는 이처럼 오랜 시간 출구를 찾지 못했던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미셸(이자벨 위페르)'이 어느 날 집에 무단 침입한 강도에 의해 강간을 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상한 건, 강도로부터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미셸의 태도이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주변을 정리하고는 한참을 혼자 생각하다가 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미셸의 모습은 보는 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미셸이 신고하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 경찰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Image© 네이버_영화)


그녀는 수십 년 전 이웃집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죄목으로 악명이 높았던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감옥에서 살아 있고, 죄 없는 그녀와 그녀의 엄마는 그로 인해 수십 년 간 주변으로부터의 괄시와 적대를 견뎌내야만 했다. 경찰과 언론은 그녀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이러한 논란과 적대심을 키우는 데에만 일조했을 뿐이었다.

게임회사의 CEO로 성공했지만, 결코 누구와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미셸은 늘 어딘가가 결여된 사람이다. 가족 관계조차 원만하지 못한 그녀는 결혼을 앞둔 다 큰 아들에게 집착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 앞에서도 장난치는 게 아니냐며 반문한다. 남편과는 이혼했지만, 남편의 여자 친구에 대해 집착하고 질투한다. 또한 회사를 함께 설립하며 오랜 시간 지내 온 친구에게는 비밀로 한 채, 그의 남편과 섹스파트너 관계를 지속한다. 창문이 수십 개는 되는 저택에서 혼자 살아가는 이 여인의 모습은, 미셸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단적으로 비유하는 것 같다. 사회적 낙인과 시선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 성공했지만, 결코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미셸. 그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늘 변두리에 간신히 서 있는 것만 같다.


(Image© 네이버_영화)

폭력에 대처하는 그녀의 방식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인생의 변두리로 밀려나야만 했던 건, 결코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아버지의 그늘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를 한 차례 강간했던 강도는 다시금 그녀의 집에 들어와 강간을 시도한다. 그런데 복면을 가까스로 벗겨보니, 강간범은 그녀의 집 맞은편에 사는 화목한 부부의 남편이었다. 미셸이 호감을 품을 만큼, 부부로서나 이웃으로서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는 실제로는 성도착증을 가진 강간범이었던 것이다. 미셸이 경영하는 회사의 한 남자 직원은, 평소에는 그녀에 대한 호의와 지지를 보냈지만, 뒤에서는 강간하는 모습을 흉내 낸 게임 동영상에 미셸의 얼굴을 합성해 회사 컴퓨터에 유포한다. 미셸이 그나마 의지했던 전 남편은, 알고 보니 같이 사는 동안 그녀를 폭행했었고, 섹스파트너인 로베르는 그녀가 성폭행을 당했거나 다리를 다쳤음에도,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정말로 이상한 건 미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수치심이 우리의 행동을 막을 만큼 강하진 않아.


미셸은 어린 시절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력에 계속해서 노출되어 온 인물이다. 사회적 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미셸이 원하지 않았던 수많은 폭력의 순간들이 어쩌면 그를 이토록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을지 모른다. 자동차 사고를 당해도 연락할 때가 마땅치 않아 앞집의 강간법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모순적이면서도 기괴하기까지 하다. 정작 그녀에게 필요한 것,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비정상적인 관계에 순응하는 쪽을 택해 왔던 미셸의 행동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폭력에 맞서다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거짓말을 그만두기로 했어."
그래서 그녀를 둘러싼 이 괴물 같은 관계들은 다 어떻게 되었냐고? 동영상을 유포한 직원은 미셸에게 덜미를 잡히고, 미셸은 섹스파트너였던 로베르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절친인 안나에게 그 사실을 고백해버린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묻는 로베르에게 '거짓말을 그만두기로 했다'라고 미셸은 말한다. 앞집 남자는 미셸을 다시 한번 더 강간하려다가, 그녀의 아들에 의해 발견돼 죽게 된다. 그리고 미셸은 강간범과 지속되었던 관계를 덮어놓는다. 답답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계속되어 왔던 이 폭력적인 관계들이 하나둘씩 정리될 때 즈음, 영화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Image© 네이버_영화)




영화 '엘르(Elle)'를 본 많은 이들이 미셸 또한 사이코패스이거나 폭력적인 인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녀의 행동 방식이 조금 비정상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미셸 또한 결국 그녀를 둘러싼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상적인 애정관을 형성하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무언가가 결핍된 채 성장해야만 했던 그녀가 보여주는 삶은 답답하지만 훨씬 더 솔직하고 현실적이다. 영화를 결말을 보게 될 때면, 미셸이라는 인물을 만든 이 사회의 괴물 같은 얼굴 또한 마주하게 될 거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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