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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dy Jun 13. 2018

나를 지키는 것이 결국 나를 파괴한다

영화 '도쿄!(Tokyo!)' 리뷰

2명의 프랑스인 감독, 1명의 한국인 감독, 배경은 일본의 '도쿄'. 조합만으로도 독특한 이 영화는 3인의 감독이 일본의 수도 도쿄를 배경으로 각각의 작품을 연출해 엮은 연작 영화이다. 국내에서는 봉준호 감독이 여기에 함께해 특히나 주목을 받았다. 영화 '도쿄!(Tokyo!)'는 현대화의 상징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 도쿄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감독 각자가 바라본 현대사회의 단면들을 독특한 스타일로 그려내고 있다.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감독의 <아키라와 히로코(Interior Design)>, 레오 카락스(Leos Carax) 감독의 <광인(Merde)>,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가 그것이다.


영화 '도쿄!(Tokyo!)' (Image© Allo_cine)

꼭 대단한 걸 해야만 하는 거야? : 의자가 되어 버린 '히로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아키라와 히로코(Interior Design)>는 도쿄에서 살아가는 한 젊은 커플의 삶을 그린다. 시골에서부터 함께 자라 많은 시간을 보내온 커플인 아키라와 히로코는, 도쿄에 상경했지만 마땅히 머물 아파트를 찾지 못한 채 혼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신세를 지게 된다. 아키라는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는 영화를 만들며 물건 포장 아르바이트를 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런 남자 친구를 따라 함께 도쿄에 온 히로코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은 없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보이지 않는 도쿄에서의 생활은 매일매일이 고난과 역경이기 때문. 친구 눈치가 보여 빨리 아파트를 구하고 싶지만, 막상 둘의 형편에 맞는 조건의 아파트는 찾기가 힘들다. 불법주차로 자가용까지 빼앗긴 히로코는 벌금을 낼 수 없어 차가 폐차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런 그녀에게 '야망이 없다'며 핀잔을 주는 남자친구와, 돈도 안 벌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만 한다며 험담하는 친구까지. 히로코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소소하게 사는 삶도 너희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항변하다가, 결국 의자로 변해버린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아키라와 히로코(Interior Design)> (Image© 네이버영화)

한 번은 일본과 한국사회를 함께 다룬 웹툰 <세 개의 시간>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작중에, 왜 일본에서 한국으로 와서 취업을 하려고 하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에 "일본엔 이미 대부분의 것들이 있거든"이라 답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미셸 공드리가 그린 도쿄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 이미 대부분의 것들이 갖춰져 있어 더 이상의 특별한 것들을 찾기가 힘든 곳. 야망과 꿈을 갖고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그것조차 쉽지 않은 곳. 동시에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인간으로 비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곳. 공드리가 그리는 도쿄의 모습은 지금의 서울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결국 이 커다란 도시에서 자기만의 쓸모를 찾지 못한 히로코가 의자가 되는 건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꽤나 기괴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의자가 되어 어느 음악가의 집에서 몰래 살아가는 히로코의 삶은 이전보다는 조금 더 행복해 보여 다행이지만, 하나의 기능으로서만 인간을 정의하는 현대사회를 꼬집고 있는 것 같아 우울하다.

의자가 되어 살아가는 히로코의 삶은 이전보다는 조금 더 행복해 보여 다행이다. (Image© Allo_cine)

잘 정돈된 일본사회를 위협하는 <광인(Merde)>
레오 카락스 감독의 <광인(Merde)>는 3편의 연작 중 가장 충격적이고 기괴한 연출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평화로웠던 도쿄의 거리에서 맨홀 뚜껑을 열고 나타난 한 미치광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배우 드니 라방(Denis Lavant)의 연기로 더욱 강렬한 느낌을 살렸다. 수염은 비뚤어지고 한쪽 눈은 흰자위뿐인 데다가, 절뚝이며 꽃과 돈을 밥처럼 먹는 광인의 이미지는 영화를 보는 이마저 소름 돋게 만들기 때문. 처음에는 거리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전부였던 이 광인은, 어느 날부턴가 도쿄 거리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다. 어디서 왔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 지조차 모를 이 광인을 체포한 일본 정부는 광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어느 프랑스인을 데려다가 취조하고 재판해 사형까지 시키려 한다. 하지만 금세 도망가버린 광인은 몇 달 후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광인(Merde)> (Image© Allo_cine)

영화에서 '광인'이 상징하는 바는 꽤나 복합적이다. 정부로부터 체포되기 전, 광인이 거처하는 도쿄 거리 아래의 지하도 굴 안에는 일본의 과거 제국주의 깃발과 당시 사용하던 폭탄이 그대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폭탄은 금세 광인의 손안에 들어가, 도쿄 거리의 시민들을 위협하는 폭발물이 된다. 이러한 배경들을 조합해 보면, 레오 카락스의 <광인(Merde)>는 현재의 일본 정부가 덮어 놓은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의 잔재들을 꼬집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도쿄의 거리가 보여주듯, 지금의 일본사회는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아래의 어두컴컴한 지하로에는 일본의 과거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일본사회를 공포에 떨게 만든 광인은, 다른 어떤 곳에서 온 것이 아닌 일본의 과거가 낳은 괴물이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인 것 같다. 일본사회가 낳은 이 미치광이 괴물은, 일본의 것이지만 출처도 알 수 없고 소통도 할 수 없는 상황. 다시금 몇 달 뒤 미국에서 광인이 출몰했다는 결말은, 결국 이 이야기가 일본만의 것이 아닌 제국주의를 거쳐온 강대국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이 아닐까.

레오 카락스 감독의 <광인(Merde)> (Image© Allo_cine)

"지금 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어!" :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
마지막 연작, 봉준호 감독의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는 10년 넘게 집에서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한 히키코모리 남자의 시점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멀쩡히 회사도 다니던 그였지만, 사람들과의 접촉에 지쳐 집에서만 기거하게 되고 햇빛을 쬐는 것조차 피하게 된다. 집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물건을 흩뜨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그는 매주 토요일마다 피자배달을 시켜 먹는다. 그리고 어느 날 피자 배달을 온 여자 알바생이 갑작스런 지진과 함께 그의 집안으로 쓰러지게 된다. 사람을 접촉하는 것조차 싫어하던 그는, 쓰러진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게 된다. 그러던 중 그녀의 몸에 그려져 있는 여러 버튼들을 발견하게 된다. 버튼을 누르니 깨어난 그녀는, 히키코모리 남자의 집을 보며 완벽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녀의 일에는 염증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봉준호 감독의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 (Image© Allo_cine)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히키코모리 남자는 어느 날 자기 집에 배달 온 피자집 주인 아저씨로부터 여자 알바생이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틀어박히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왠지 모를 연민과 관심을 느낀 그가 드디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선다. 십수 년 만에 나서는 집 밖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그녀가 살고 있다는 동네로 찾아가던 그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낀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던 것. 심지어 피자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만둬, 이마저 로봇이 대신하고 있는 기괴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봉준호 감독의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 (Image© Allo_cine)

사람들은 더 이상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히키코모리'라는 일본 단어가 증명하듯, 이미 이는 일본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사람들과의 접촉에 염증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수많은 이들이 집안으로만 숨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또한, 히키코모리 남자주인공이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대부분이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텔레비전을 보며 오랜 시간 나오지 않은 이들이 다수. 사람들과 마주칠까 걱정했던 그가 집안에 틀어박힌 다른 이들을 보며 하는 말은 아이러니하다. "저 사람은 5년쯤 되었겠네." "저 사람은 적어도 10년은 넘은 것 같고..." 한산했던 거리가 소란해지는 건, 오직 지진으로 땅과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위협이 느껴질 때다. 그마저도 거리로 나왔던 이들은 지진이 잠잠해지자 다시 집안으로 들어간다. "지금 나오지 않으면 안 돼! 다시 들어가지 말아요." 집 밖이 무서웠던 히키코모리 남자는 이제 다른 히키코모리들을 구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건 결국 다른 한 인간이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Image© Allo_cine)

인상 깊었던 건, 히키코모리가 되어 가는 여자 알바생이 자신의 몸에 직접 '감정 제어' 버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사실상 내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우선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때마다 내 감정은 다른 이의 감정에 치인 채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타인과의 만남도 쉬운 일만은 아닌 게 된다. 히키코모리로 가득 차게 된 도시의 현실을 반영한 이 작품은, 내 감정만이라도 나 자신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십수 년 간 집안에만 칩거하던 히키코모리 주인공이 다른 이들에게 '집 밖으로 나오라'고 외치는 장면은 마음이 찡하기까지 하다.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건 결국 다른 한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지키는 것이 결국 나를 파괴한다 : 두 독사 이야기


두 독사가 있었어. 한 독사가 물었어. 
우리는 몸에 독을 지니고 있지? 
응. 근데 왜 그건 왜 물어? 
그러자 한 독사가 다른 독사에게 말했지. 
나 방금 혀를 깨물었어.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독(Poison)'이 결국은 나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 (Image© Allo_cine)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Interior Design)>에 나오는 '두 독사 이야기'는 이 3편의 연작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독(Poison)'이 결국은 나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 레오 카락스의 <광인(Merde)>에서는 일본의 과거사를 상징하는 광인(Merde)이,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에서는 타인과의 접촉을 차단한 히키코모리의 삶 자체가 그것이다. 정갈하게 정돈된 일본사회의 밑바닥에는 일본정부가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일본의 과거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발전을 위해 덮어놓은 채 그대로 둔 그들의 과거는 '광인'이라는 독이 되어 일본사회를 공격한다. 타인과의 접촉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시작한 히키코모리로서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당장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타인과의 완전한 단절이 온전한 해결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선택이 나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그것들을 늘 손에 쥔 채 지내고 있는 것 아닐까.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한순간에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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