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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dy Jun 14. 2018

반항의 아이콘, 트뤼포의 자전적 영화

영화 <400번의 구타> 리뷰

흔히들 아이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천편일률적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만물에 대한 호기심, 세상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눈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순수함과 동심, 그 이외의 것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제까지나 어른의 눈높이보다는 조금 낮은 지점에서 세상을 아름답게만 바라보기를 바라는 어른들. 그들의 눈에 아이들은 그저 판단능력이 없고 자기 견해는 아직 형성하지 못한 미숙한 존재일 뿐이다. 사회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울타리 안에 넣어두고, 아이들이 말하는 모든 의견과 주장들을 단순한 떼쓰기로 치부한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만큼 머리는 성숙했지만, 그 어떤 정치적, 사회적 의사표현도 자유로이 인정받지 못하는 어중간한 나이.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400번의 구타>는 이러한 ‘어중간한’ 어린 시절에 대한 감독 본인의 회고록이다.

억압과 규율에 대한 반항을 일삼는 아이처럼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소년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유명한 트뤼포 감독은 영화 <400번의 구타>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장 피에르 레오’라는 아역배우를 통해 본인의 어린 시절을 있는 그대로 투영했다. 폭력적인 새아버지와 자신에게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어머니가 있는 가정에도, 자유와 개성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 학교에도 정을 붙이지 못한영화상 주인공 ‘앙투안 드와넬’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젊은 시절과 똑 빼닮아 있다. 감독 스스로도 기성세대의 억압과 규율에 대한 반항 심리를 언제나 내보이고 있었기에 영화 <400번의 구타>는 자연스럽게 트뤼포 감독의 자전적 영화가 되었다. “400번의 매질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는 프랑스의 오래된 속담에서 가져온 <400번의 구타>라는 제목은 불합리한 억압과 폭력의 논리를 아이들에게까지 주입하려 하는 어른들,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다. 

Imageⓒ Louis_Quatorze

영화는 시작부터 막을 내리기까지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어진다. 학교를 결석하고 친구와 거리를 배회하는 앙투안의 속내를 제대로 들여다보기는커녕 폭력을 휘두르고 방치하는 영화 속 어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아이들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이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깊은 사고를 무시로 일관하는 기성세대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비교적 부족하다고 해서, 자기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아예 부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감독은 앙투안이라는 소년을 통해 보여준다. 별다른 고민 없이 불필요한 것들을 틀에 맞춰 계속해서 유지해나가려는 것은 오히려 어른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상처받고 발전하지 못하는 건 오히려 아이들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들의 다그침과 불합리한 폭력에도 눈에 띄는 표정 변화 없이 집과 학교, 거리를 오가는 데 거리낌이 없던 앙투안은 단 한 번,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제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는 게 낫죠.”
화면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소년의 눈빛은 눈물 맺힌 어린 아이의 그렁그렁한 눈망울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의 시작부터 그랬듯, 담담하지만 쓸쓸하게 내뱉는 이 대사는 가정과 학교로부터 애정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홀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왔던 소년,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어른들의 불합리한 말들이 나의 생과는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으며, 더 이상 영향을 끼칠 수도 없다는 것을 단번에 주장하는 눈빛이었다. (트뤼포 감독의 페르소나로 20여년을 활동했던 이 아역배우의 연기도 한몫했다.)


제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는 게 낫죠.
Imageⓒ allocine.fr

한계를 만나는 수많은 순간들이 지금의 어른을 만든다
내용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배경으로 지나가는 파리의 풍경은 이전 시대까지 봐왔던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으며, 몰입감이 더해지는 실제적인 연출이다. (실제로는 연출이 아닌 것으로 알지만.) 영화의 풍경이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영화의 결말까지 아름답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해변에서 자유롭게 뛰어가는 주인공 앙투안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멈춰선 채 화면을 바라보는 장면은 낭만이 아닌 현실을 조금씩 깨우쳐 가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더 보여주는 듯하다. 기성세대의 무관심과 폭력 속에서 온전한 자유보다는 그 안의 한계에 부딪히고 마는 것이다. 아마 한계점을 만나는 수많은 순간들이 모여 점차 어른이 되어간다는 암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해변에서의 마지막 정지화면만 보면, 누군가의 조금 오래된 어린 시절 사진을 가져다 놓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트뤼포 감독의 어린 시절의 초상이라는 걸 은근히 보여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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