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타는 여여사 Apr 07. 2019

그럼에도... 잡고 싶을 때에는

소설  <실상사>

어딘가를 헤맨다. 가고자 하는 곳의 이념은 높기만 하고, 처해 있는 현실은 팍팍하기만 하다. 정도상의 《실상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잃어버린 무엇’을 찾기 위해 실상사까지의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봄을 지나 여름이 되고, 가을을 거쳐 겨울이 될 때까지 방황하던 사람들은 실상사에서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고즈넉한 곳, 실상사에 젖어 든다.




통일운동을 하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힘겨워하던 주인공 나, 자본주의 욕망에 굴복하여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영혼과 육체가 피폐해진 국희, 욕망의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려 죽은 시골청년 현우, 권력과 언론에 기생하여 성공한 타락한 벤처사업가 김성철. 모두 실상사를 찾아온다.


실상사에서 어떤 이들은 마음의 안식을 얻고 상처를 치유 받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정신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했고, 분열된 자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모든 이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고요한 강물처럼 말없이 담는다.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사바세계로 넘어온 목탁 소리로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며 귓가에 이렇게 속삭인다.


괜찮다.

너는 충분히 잘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네 마음만 돌아보라.


마지막으로 원고를 쓰기 위해 실상사를 찾은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나. ‘뻔뻔스러운’ 나는 육체노동자인 친구 봉구의 모습에서 자신의 허위의식과 허명을 깨닫는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나는 봉구가 보고 싶었다. 봉구의 목소리를 통해 「좆도 아닌」 내가 떠올라 하염없이 울었다. 울음소리에 가려서 나는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저 멀리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그의 뺨을 살포시 어루만졌다는 것을. 울음소리에 가려서 나는 듣지 못했을지 모른다. 사(死)는 것은 사(生)는 것이라는 걸."   - 소설 《실상사》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책으로의 긴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