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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15. 2020

선과 면

회사 이야기

학창 시절에 미술 수업 시간은 늘 부담이 됐다. 소질도 없었고, 센스도 부족했다. 미술 학원 문턱이라도 넘어봤으면 잔기술이라도 배웠을 텐데, 피아노 학원이나 컴퓨터 학원만큼 미술 학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수채화를 그릴 때는 물과 물감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을 많이 섞어 물감이 흘러내릴 때도 있고, 물을 적게 섞어 스케치북에 붓질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선생님은 이런저런 물감을 섞어서 색을 만들면 나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했지만, 이런저런 물감을 섞으면 섞을수록 내 그림은 점점 탁하고 어둡게 변했다. 어찌나 색감도 떨어지는지... 고통스러운 미술 시간 중에 그나마 기다려지는 수업이 있었는데, 바로 데생 시간이다.       


수채화를 그릴 때는 물통도 준비하고 여러 색의 물감과 다양한 굵기의 붓을 준비해야 하지만, 데생을 할 때는 4B 연필과 지우개, 스케치북만 있으면 된다. 준비물도 간단하다. 데생을 좋아했던 또 다른 이유는 소리 때문이다. 스케치북을 가볍게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ASMR과 같다. 연필로 사각사각 선을 그으면 잡생각이 들지 않았고, 집중해서 그리면 시간도 후딱 갔다. 미술반에 있는 외국 사람들, 그러니까 줄리앙, 아그리파, 비너스와 같은 인물상은 미술 관련 입시를 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고, 나 같이 평범한 학생들은 주로 원통이나 정육면체, 삼각뿔 모양의 물체를 교탁 위에 올려놓고 각자의 위치에서 보이는 대로 그렸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처음에 선을 그을 때는 손이 떨렸지만, 몇 번 하다 보면 자신감이 생겨 쭉쭉 선을 그었다.    

    

물론 선생님의 지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데생 시간을 좋아했던 것이지 그림을 잘 그렸던 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딴에는 빛의 방향을 가늠하고 연필로 열심히 덧칠해서 명암을 만들었는데, 옆자리를 지나가던 선생님은 멈춰 서서 말씀하셨다.       


『이 부분은 선이 과하고, 이 부분은 선이 좀 부족해. 적당히 조절해서 그려.』      


그 말을 듣고 그림을 보니 또 그런 것 같다. 선으로 덧칠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삼각뿔 물체의 입체감은 또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적당히 조절’하라는 선생님의 말이 당시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적당히 조절’하라는 말이 대충 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삼각뿔 한쪽 면에 명암을 만들 때 100개의 선이 적당한지, 150개의 선이 적당한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뭔가 부족해 보여 자꾸 선을 추가했다. 불필요한 면은 계속 늘어났다. 교탁 위의 삼각뿔은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내 스케치북 위에서 점점 어두워져 갔다.      




업무를 할 때 ‘열심히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 모두 퇴근하는데 남아서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해서 열심히 일한다. 물론 열심히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노력하는 사람이 백번 낫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일해서 결과까지 좋으면 누구에게나 열심히 하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회사 일이란 게 꼭 그렇지는 않다. 열심히만 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조절’해서 일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100개의 선을 그려도 되는 일이 있고, 150개의 선을 그려 면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 있다. 회사는 50개의 선을 더 그리는 불필요한 노력보다 정확하고 확실하게 100개의 선을 그려 일을 끝내는 능력을 더 원할 때도 있다. 모든 일에 150개의 선을 그린다고 해서 잘했다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 열심히만 일한 사람은 회사에서 본인의 노력을 몰라주니 오히려 섭섭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떤 일을 ‘적당히 조절’해서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후루룩 대충 처리하면 상사의 결재판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무턱대로 아무 생각 없이 노력만 쏟아부으면 일머리가 없다는 잔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결재판을 맞지 않고 잔소리를 덜 듣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일의 강약을 먼저 선택하고, 더 집중해야 할 일을 정한 후 제대로 된 업무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회사는 열심히 선을 그리는 데만 집중하는 사람에게 성과를 인정하고 보상해 주지 않는다. 선을 100개쯤 그려야 적당할지, 선을 150개쯤 그려야 적당할지 우리는 매일 선택지를 받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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