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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Oct 14. 2020

숙성 시간

관계 이야기

이상하다. 이렇게 질긴 고기가 아니었는데 변한 듯하다. 엄마가 해줄 때는 말랑하고 육즙도 풍부했는데, 오늘 구운 고기는 질기고 퍽퍽한 느낌이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서야 원인을 알았다.    

  

『냉동실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신선도가 좀 떨어지지. 그리고 냉동실에서 바로 꺼내서 굽지 말고 바깥에 좀 놔둬서 녹이는 게 더 낫다. 그럴 때는 배나 사과를 좀 갈아 넣어서 고기를 부드럽게 해 주면 좋아.』    

  

냉동된 고기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윙~~ 돌려서 해동시킨 후 센 불에 바로 구웠더니 고기도 성질이 났는지 제대로 된 맛을 뿜지 않은 것이다. 엄마가 미리 말해줬어도 했을지 싶다. 당장 배가 고파서 생고기라도 뜯어먹을 판에 고기의 숙성 시간을 기다려줬을지 의문이다. 1시간 정도 미리 꺼내놓고 배즙이라도 넣었다면 같은 고기 다른 맛을 느꼈을 텐데 말이다.       


카페 사장은 로스팅 후 바로 드립 해서 마시는 것보다 7일 정도 숙성시킨 다음에 마시는 게 좋다고 했다. 서로 다른 잔에 드립 해서 맛을 비교해 보라고 했다. 나같이 둔한 사람은 맛의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 입천장을 맴도는 커피 향까지 잡아내는 친구는 미세한 맛의 변화를 느꼈다. 로스팅 후 원두 조직에 포함되어 있는 이산화탄소 등 불순물이 빠져나오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하긴, 센 불에서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며 들들 볶인 콩도 정신 차릴 시간이 필요해 보이긴 하다. 원두의 숙성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한 번 볶은 원두를 1년씩 두고 먹으라는 얘기는 아니라며 웃었다. 원두는 오래 둘수록 향이 날아가고 기름기가 빠져나오니 빨리 마시라고 했다. 원두의 숙성 시간은 정해진 게 아니라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코로나-19 이후로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꼭 만나야 하는 경우는 필요한 말만 하고 서둘러 헤어지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과는 관계가 거의 단절되었고, 어떤 사람과는 온라인으로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고기나 원두가 숙성 시간을 거치면 이전보다 나은 맛과 향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숙성 시간을 거쳐서 이전보다 끈끈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면 좋겠다.   


지금은 좀 힘들고 답답하지만 관계가 숙성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전보다 더 좋은 맛과 향이 났다면 제대로 숙성되는 시간을 거친 것이고, 오히려 맛과 향이 변했다면 숙성이 아니라 부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적당한 효소와 미생물이 포함되고 오해나 서운함 같은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잘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기다. 관계가 부패하지 않도록 가끔씩 안부 전화를 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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