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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Sep 09. 2021

할머니와 수제비

감나무가 있는 마당

   이틀 비가 . 빗소리에 잠을 설쳐 몽롱하게 깨어난 아침, 창 너머 젖은 숲을 보다 수제비 반죽을 했다.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밀가루에 부추를 잘게 썰어 넣고 물은 조금만 넣었. 날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살살 뭉치고 가만가만 치댔다. 치댈수록 매끄러워지는 반죽. 국물은 감자와 양파를 넣고 우리기로 했다. 물이 끓을 때 냄비 뚜껑을 열고 감자와 양파를 칼로 비스듬 삐져 넣었다. 수제비를 끓일 때면 어릴 때 보았던 할머니 모습을 흉내 내게 된다. 감자도 호박도 칼로 툭툭 삐져 넣던 할머니. 경상도 깊은 산골, 할머니 집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수제비를 먹었던 어느 날의 기억. 한참 잊고 살았던 정경이 나이 들면서 자주 떠올랐다. 며칠 전 일은 곧잘 잊으면서 그런 기억들은 어째 세월이 갈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일까.          

부추를 넣은 수제비 반죽
감자수제비

  할머니는 수제비를 가마솥에 끓였다. 깊숙한 아궁이 위에 커다란 무쇠 가마솥이 항시 걸려 있던 할머니의 부엌. 아궁이에 볏짚을 넣어 불을 지피면 시커멓게 반들거리는 가마솥에서 이내 하얀 김이 올랐다. 가마솥 앞 나무토막에 앉아 감자와 애호박을 숭덩숭덩 삐져 넣고, 물을 묻혀가며 수제비 반죽을 얇게 펼쳐 넣던 할머니. 뽀얀 국물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과 구수한 냄새, 나무 등걸 같은 할머니 손. 아궁이에 불을 지펴 온돌을 데우고 밥을 익히던 부엌은 늘 어둑했다. 경상도에선 정지라 부르던 부엌. 집에서 가장 흥미롭기도 했던 그곳을 팔랑팔랑 가볍게 들락거리며 놀았을 뿐인데,  그리움의 원형처럼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앞뒤로 나무문이 있던 정지는 바람이 오가는 통로면서 김이 서린 아늑한 공간이기도 했다. 여름날엔 앞뒤 문이 활짝 열려 환한 앞마당을 지나온 바람이 그늘진 뒤꼍으로 흘러갔고, 겨울에 문 닫면 집안 어느 곳보다 따뜻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내 어릴 적 꿈은 감나무 있는 마당을 보며 사는 것이었어.”  

  수제비를 먹은 아침, 동생과 커피를 마실 때 내가 중얼거렸.   

  무슨 애가 꿈이 감나무야.”  

  동생이 비 오는 바깥에 시선을 두고 말했. 동생도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더니 반응에 성의가 없었다.  번이나 듣는 감나무 얘기니 그럴만했다. 좋아하는 시구절을 이따금 읊어대는 나로선  혼자서중얼거리고 싶어 진다. 나무가 있는 마당. 우리 집 마당에도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년 전 묘목  그루를 텃밭 둘에 심어 놓았다. 감나무가 자라기엔 추운 지역이라 직도 묘목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그래도 여름이면 도톰한 감잎 내어 기척을 알려준다. 무마다 갑자기 성장하는 시기가 있으니 언젠가 부쩍 자라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

추운 강원도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는 마당 감나무

  버지의 엄마, 산골 할머니 댁엔 주 큰 감나무마당에 있었다. 할머니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이 오래된 감나무였다. 일찍 할아버지를 여 할머니는 혼자 자식들을 키워 세상에 내보내고 감나무와 함께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달빛을 받으면 유난히 반짝이던 진초록 감잎과 작은 왕관처럼 생긴 살색 감나무 꽃. 그 꽃들을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며 하나씩 입에 넣었던 것도 할머니께 배운 것이었을까. 장작도 없이 오직 불쏘시개만으로 밥을 짓고 구들을 데운 할머니. 정지 아궁이 맞은편엔 천장에 닿도록 잔가지들이 수북 쌓여 있었다. 늘 나뭇짐을 하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고달픔을 어릴 땐 몰랐다. 그래도 그 아궁이의 불빛은 중년의 내가 산골로 올 수 있도록 믿는 구석이 되어주었다. 할머니는 그 척박하던 시절 이곳보다 더 깊은 산골짜기 흙집에서, 긴 세월 을 일구며 아궁이 불빛을 꺼뜨리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꼿꼿하게 살아낸 그 삶엔 기품이 있었다. 가만가만 움직이며 말씀이 적었던 할머니를 참 좋아했다는 걸 나이가 들깨달았다. 나무를 좋아하는 내 성향도 할머니 집에서 보낸 그 시절에 움이 텄을 것이다. 이름도 고운 김입분 할머니.


    , 나두 어제부터 수제비 먹고 싶었어.”  

  할머니 생각을 하며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는 말에 동생 생기를 찾았다. 까지 뿌루퉁 내밀면 어쩌자는 건지.

  “비 그치면 애호박 따서 만들어 줄게. 감자수제비보다 애호박수제비가 더 맛있어”

  하 웃으며 타협을 했다. 이른 시각이라 그냥 간단히 자 먹고 말았는데, 이왕이면 넉넉히 만들어 나눠줄 걸 그랬다. 밀가루 음식을 자주 먹는 동생에게 굳이 먹이고 싶지 않은 심리가 무의식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제비는 비 올 때 먹어야 제 맛이지, 종알대 동생이 자기 집으로 건너갔다. 창밖의 비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게 내리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다시 내 집에 놀러 온 동생 손에 둥근 애호박 하나가 들려 있었다. 우산 쓰고 비탈길 아래 호박밭까지 가서 따왔다 했다. 못 말릴 동생이다.


  비가 이어진 늦은 오후, 수제비를 만들어 동생 창가에서 먹었다. 먹은 감자수제비도 맛있었지만, 역시 동생과 먹은 애호박수제비가  좀 더 맛있었다. 두어 시간 냉장 숙성시킨 수제비 반죽은 더 쫄깃거렸고, 애호박과 가지, 붉은 청양고추를 채 썰어 넣은 국물 맛은 깔끔하면서 칼칼했다. 자와 애호박의 차이라고는 볼 수 없다. 엇이 들어갔나 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만 것에서 맛의 차이가 난 것일 테니까.  

 

동생과 먹은 애호박수제비

할머니와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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