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영화

토니 타키타니

by 구름나무

날이 추워지면서 일찍 자고 일찍 깨어나게 되었다. 해가 산마루를 넘어가 어둑해지면, 슬금슬금 전기요를 켜 둔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어 진다. 얼굴은 차갑지만 발은 따뜻한 상태. 스탠드 불 켜고 책이나 스마트 폰을 들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잠들게 된다. 잠자리에선 스마트 폰을 멀리하라지만 내겐 유익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잘 빠져드는 편이라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잡다한 생각으로 잠들기가 어렵다. 스마트 폰에서 30분 정도로 진행되는 자극 적은 콘텐츠를 선택한다. 주로 세계 테마 기행 같은 영상. 어젯밤엔 영하 50도까지 떨어진다는 러시아 툰드라 지역 기행을 틀어 놓았다. 추운 계절, 더 추운 곳의 설경으로 아늑함을 느끼는 효과랄까. 눈이 피로해지지 않게 영상보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 결에 내가 사라진다. 다시 돌아오는 건 보통 다음 날 새벽 두세 시 정도. 깨어나고도 이불속 온기를 좀 더 즐기기 위해 다시 스마트 폰을 손에 든다. 새로 읽을 만한 책보단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새벽을 고즈넉이 즐기기엔 영화가 적당하다.

새벽마다 한 편씩 영화를 보고 있지만 오래 생각날 것 같은 영화는 '베스트 오퍼', '미스 포터', '경주', '논픽션', '토니 타키타니' 정도다. 모두 왓챠에서 본 영화. 깊이 있게 영화를 감상하는 편도 아니고, 제대로 된 스크린으로 보는 것도 아니어서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조심스럽다. 그래도 이왕 이야기를 꺼냈으니 겨울 새벽에 어울리는 영화로 <토니 타키타니>를 소개한다.

토니 타키타니는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 ‘토니 타키타니’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흑백 톤 영상과 차분한 음성 내레이션이 영화를 이끄는데, 때로 액자형 이야기 틀을 허물고 영화 속 인물이 내레이터 대사를 이어받기도 한다. 그 경계의 허물어짐이 꿈과 현실을 섞어 놓은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관에서 객관으로 넘어가는 이동은 낮과 밤, 삶과 죽음처럼 불현듯 스며든다. 얼핏 자연스러우면서도 끝내 불가해한 간격의 서늘함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남녀 주인공은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남주인공 토니 타키타니는 아버지 쇼자부로를, 여주인공 에이코도 히사코 역을 함께 맡고 있다. 영화에 흐르는 주제곡은 고독‘Solitude'.

토니 타키타니는 고독에 익숙하다. 토니를 낳은 직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재즈 선율을 따라 자유롭게 떠도는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아가지만 외롭다기보다는 혼자가 편하다고 그는 여긴다. 유일한 관심사는 그림을 그리는 것. 기계를 정교하게 그리는 것에서 시작된 재능으로, 성장한 뒤 유능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된다. 그림을 그리며 단조롭게 살던 그는 어느 날 작업실을 방문한 여인 에이코에게 강하게 마음이 끌린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먼 세계로 날개 짓하는, 특별한 바람을 몸에 두른 새처럼”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고, 이삼 년 만에 잠시 만난 아버지에게도 에이코에 대해 말한다. 만남이 몇 번 이어진 뒤 에이코에게 청혼하여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을 통해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다시 외로워질지 모른다는”생각에 식은땀이 나도록 무서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대체로 원만하고 행복했다. 한 가지 토니 마음에 걸리는 건 옷에 대한 에이코의 지나친 갈망이었다. “옷이란 내 안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에이코는 7백 벌이 넘는 옷을 사고도 새로운 옷을 계속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옷 사는 것을 조금 줄여보는 게 어떨까, 라는 토니의 조심스러운 말에 수긍하여 노력을 해보는데, 그것이 사고로 이어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에이코는 사라지고 에이코의 옷만 가득 남아 있는 방. 토니 타키타니는 그 공간에 가득 찬 옷들이 에이코의 그림자로 여겨져 견디기 힘들어한다. 오직 그 옷을 입어줄 수 있는 체형을 조건으로 히사코라는 여성을 고용해보기도 하는데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에이코의 옷을 헌 옷 장수에게 아무렇게나 처분한다. 이 년 뒤 아버지 역시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악기와 수많은 레코드판을 남긴다. 아버지 레코드판을 한동안 에이코의 텅 빈 옷방에 넣어두지만 그조차 중고 장수에게 넘겨버린다. 이제 토니가 할 수 있는 건 완전히 비어버린 옷방에 가끔 들어가 웅크리는 것밖에 없다. 그러다 문득 죽은 아내 옷을 입히려 고용을 시도했던 히사코를 떠올린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옷이 너무 아름다워서인 것 같다고 울음을 터뜨리던 여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다 내려놓는 것으로 화면의 마지막 온기는 사라진다. 본연의 고독, 주관과 객관의 경계조차 없는 그곳에 토니 타키타니는 혼자 남았다.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굉장히 쓸쓸했다. 토니 타키타니가 된 듯, 너무 쓸쓸해서 생명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빙판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익숙한 내 사물들, 이불속 전기요 온기와 냉장고 팬 돌아가는 소리, 붉은 숫자로 시간과 온도를 알려주고 있는 전자시계에 안도할 정도였다. 오래된 예술품을 복원하듯 따뜻한 입김을 불어 차디찬 근원의 고독을 드러낸 영화. 그렇듯 차갑게 바닥을 드러낸 자리 순환의 원리로 다시 채워질 것이다. 묵묵히 살아가는 일상과 서로의 체온이 있는 한.


차가운 것으로 따뜻함을 불러오고, 텅 빈 것으로 가득 차는, 다소 모호하지만 내가 선호하는 영화들이 대개 그렇다. 영화를 고르는 뚜렷한 기준이 있다면 공포와 폭력물은 제외한다는 것. 현실을 많이 벗어난 이야기엔 몰입이 힘들어 또 제외. 까다로운 기준은 아닌데, 원하는 조건에 맞는 새로운 영화를 찾기가 쉽지 않다. 굳이 새로운 영화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새벽에 어울리는 영화는 많다. 한 번은 꼭 다시 보고 싶은 <안토니아스 라인>, <시네마 천국>, <아름다운 비행>,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토탈 이클립스>, <흐르는 강물처럼>, <길버트 그레이프>, <바그다드 카페>, <빅 피쉬>, <포레스트 검프>, <빌리 엘리어트>, <프라하의 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터미널>, <굿 윌 헌팅>, <블라인드 사이드>, <건축학개론>, <왕의 남자>, <가을의 전설>, <안경>, <하와이언 레시피> 같은 영화들.


그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 나오는 대사 한 줄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한다.


“지금 이 생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이란다.”




연말 장식으로 테라스 벽에 시계를 만들었다

동생과 함께 한 연말 파티


해가 넘어가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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