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

by 구름나무

동생과 내가 사는 산골 집 마당엔 세상 여러 곳으로 가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마다가스칼, 사이프러스, 산티아고, 시에라리온, 쁘아띠에 같은 지역들. 몇 킬로미터를 가야 하는지 거리 측정은 새기지 못했지만 방향만큼은 방위에 맞게 세워두었다. 그러니까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언제고 해당 지역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정표는 산골에 집을 지은 뒤 남은 판자와 각목으로 동생이 만든 것이다. 초기엔 한창 새장이며 탁자 같은 걸 만드는 데 재미 붙이더니 한동안은 또 고양이들을 위한 집이며 계단 만드는데 골몰했다. 도시에 살 땐 선반 하나 만들어 본 적 없던 동생인데 톱질을 곧잘 했다. 우리 마당에 있는 벤치며 평상 비슷한 것들도 모두 동생 작품이다. 한창 취미를 붙였을 땐 공구 쓰는 소리가 시끄럽더니 요즘은 남은 판자가 없어 좀 잠잠해졌다. 이따금 이정표를 만들어 세운 동생 심사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공원 표지판이나 상점 간판, 버스정류장 표지판 같은 걸 원래 좋아한다.


보기엔 그럴듯해도 전문적 솜씨에는 한참 못 미치기에 대부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새들은 봄이면 그 어설픈 나무집을 몇 차례나 기웃대며 신중히 선택을 하여 깃들었다. 특히 삼월이면 날아오는 검은 딱새들은 신혼부부처럼 쌍쌍이 집을 구경하고 다녔다. 보통 한 마리는 높은 곳에서 주변을 살피고, 다른 한 마리가 집을 드나들며 꼼꼼히 상태를 점검했다. 이 집 저 집 까다롭게 탐색하며 고민하는 모습이 신혼집 구하는 인간 부부와 다르지 않았다. 집을 정하기까지 보통 일주일은 걸리는 듯했다.


마당과 숲에 동생이 만들어 달아 놓은 새집은 여덟 개였다. 반은 숲에 설치해두고 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 달아 놓았다. 왜 그런지 딱새들이 선호하는 집은 안전한 숲 속 집이 아닌, 우리 마당 울타리나 벽체에 부착해 놓은 집이었다. 그건 새들을 위해서라기보다 마당 꾸미기 일부였는데 새들 선택이 그러하니 할 수 없었다. 제비처럼 인가에 깃들어 사는 걸 좋아하는 부류인가 싶었다. 신중한 탐색을 마치고 마침내 집을 정한 새들은 그때부터 쉴 새 없이 검불을 부리에 물어 날랐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을 때는 둥지가 완성되고 알을 품고 있을 시기다. 봄에 밭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부터는 재재거리는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기 새들이 태어난 것이다. 봄이 무르익어 날이 좀 더워진다 싶을 즈음엔 손톱만 한 조그만 고개들이 봉긋봉긋 입구에 올라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부모 새들은 먹이를 물어 나르느라 또 종일 바삐 움직였는데, 우리가 마당에 있으면 몹시 경계를 해서 텃밭 일 하기에도 조심스러웠다.


안전한 숲에 둥지를 틀 것이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기 새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건 즐거웠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집에 세상 아늑한 보금자리가 꾸려지고, 꼬물대는 생명이 태어나 철저한 보살핌 속에 자라나다니. 그 과정은 늘 숙연했다. 어느 날은 세상이 어째 너무 고요하다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 새집을 들여다보면 둥지가 텅 비어 있었다. 새끼들이 성장해 모두 떠난 것이다. 먹이를 물어 나르던 부모 새도, 받아먹던 새끼들도 다시 볼 수 없었다. 한 번 허공에 날아오르면 그만이었다. 살던 곳에 다시 와 본다거나 서로 만나는 일 같은 건 없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 늘 나는 인간다운 쓸쓸함에 잠겼다. 임무를 마치면 미련 없이 흩어져 오롯이 자신 만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생명들이다.


이제는 봄이 와도 우리 마당 새집에 새들이 둥지를 트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마당에 고양이들이 거주한 뒤로 집 주변 새집들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기에, 입구를 비닐로 막아 놓았다. 새집들이 너무 낡아 이젠 장식으로도 신통치 않다. 푯말들도 낡아 부스러지고 있다. 낡은 것은 낡은 대로 또 다른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도 같다. 지금 막 도착해 아직 짐도 풀지 않은 느낌인데 산골에 온 지 여덟 해나 지난 것을 짚어보게 된다.


이정표는 가고자 하는 곳의 방향과 거리를 알려주는 표식이라 할 수 있다. 그 기원을 솟대나 장승같은 신앙 형태와 유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마을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알려준다는 점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이곳에서 저곳을 향하는 막연한 그리움이 형체를 갖는다면 그것 또한 이정표와 유사하지 않을까. 어릴 때 할머니 집 마당엔 빨랫줄을 높이 솟구쳐 올리는 장대가 있었다. 인간의 마음엔 솟구친 것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공에서 펄럭이던 빨래와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노래한 시인의 깃발을 연관 짓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에 내재된 정서는 길을 나서는 이가 찾고자 하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다. 끝내 다다르지 못할 곳에 대한 그리움인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에 대한 향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을이 깊어가는 마당. 이국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사방에 있으니 고립된 지역이라기보다는 숨어 있는 작은 항구나 공항 같다. 비밀스러운 통과 지역인 것이다. 누구도 무겁게 머무르지 않고 언제든 가볍게 지나가는 곳. 낡은 가방을 메고, 익숙한 신발을 신고, 오래된 모자를 쓴 여행객들. 바람과 구름, 산을 타고 내려오는 고양이들.







*유치환 詩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