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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숲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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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Jun 18. 2024

푸르다

   "세상 저런 울음 우는 남자도 이쓰까나. 고라니 소리가 아무렇지 않."

  끔 안부 메일을 주고받는 친구 N며칠 전 고라니 소리에 감탄하여 그렇게 표현했을 때 나는  터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렇게 적절 묘사지. 정말 처절한 괴성이다. 밤중에 '끄아악' 고라니 소리가 들릴 때면  말이 떠올라 웃게 되었다.


  리는 처절하지만 성질 고라니가 때때로 마당에 다녀가는 모양이다. 쌈 채소들이 포기째 사라지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 데이지꽃도 잡수시나. 데이지꽃이 한창인 유월 아침,  송이가 문드문 사라져 줄기만 남아 있꼴이 보다. 그로스크하달까, 보기 좀 그지만 탓할 마음은 지 않다. 


  멧돼지도 마찬가지. 봄부 여기저기 구덩이를 퍽퍽 파놓고 다니는 녀석들. 특히 비탈길 아래 돼지감자가 자라는 밭은 거의 날마다 파헤쳐졌다. 힘이 어찌나 좋으신지. 굴삭기로 팠나 할 정도로 땅속 돌덩이들까지 마구 퍼올려져 있었다. 돼지감자는 환장하게 좋아하고 갈대나 칡뿌리는 그럭저럭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 할 대상이다. 얼마 전엔 감자밭도 일부 들쑤시고 지나갔다. 톰한 잎이 푸르게 오르던 감자 줄기 축 늘어져 있었다. 데이지꽃이 무더기로 사라지고 감자밭이 다시 파헤쳐진다 해도 할 수 없다. 자연에겐 화를 낼 수 없으니.




  풀이 빈틈없이 땅을 덮고 숲이 우거지는 나날. 연신 뻗어 나오는 줄기와 더욱 짙어지는 푸 잎들로 세상은 가득 차고 있다. 한치도 머뭇거릴 새 없이 나아가는 푸른 행진을 보는 것 같다. 그 활기에 이끌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작물을 돌보고, 거두고, 을 맨. 허리를 펼 겸 가까운 산마루까지 천천히 걷기도 한다. 숲도 푸르고 하늘도 푸른 초여름. 푸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일색인 듯 보이나 저마다 제가 지닌 속도와 성미대로 푸르다. 푸름과 푸름이 겹쳐 숲은 어둠처럼 깊어진다.

        

  푸름 속에 깃든 생명들 움직임도 아졌다. , 기고, 파고들고, 뛰어다닌. 생명이 무더기로 다가오는 느낌은 두렵기도  살아 있는 게 이렇게 많다니, 질리기도 한다. 제 나름대로 정교한 구조와 본능에 따라 그저 살아갈 뿐인 수많은 생명. 그 생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삼켜야만 생은 계속된다. 생명 현상은 우주에서 아주 드문 일이고 한다. 내가 즐겨 읽는 책 저자인  물리학자 말에 의하면 그렇다. 생물은 지구 표면에 살짝 묻어 있는 정도라고. 그 드문 현상에 가 속해 있다,라고 생각해도 별 감은 일지 않는다.


  책을 통해 얼핏 상상해  우주란 도무지 모를 세계다. 모든 것이 그 세계에 속해 있고 나도 그 일부분인데 어째서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가 되면 수컷들이 울부짖고 암컷들 그에 응해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 현상도 그렇다. 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가 따로 없다. 일개 한 생명이 궁금해할 원리가 아닌지도 모른다. 푸른 생명으로 가득 찬 지금 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 한정된 시야 시간이라 해도 그렇게 가득 차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시작되 가득 차고 비워지고, 생의 곡선이 그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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