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안부 메일을 주고받는 친구 N이 며칠 전 고라니 소리에 감탄하여 그렇게 표현했을 때 나는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렇게 적절한 묘사인지. 정말 처절한 괴성이다. 밤중에 '끄아악'고라니 소리가 들릴 때면그 말이 떠올라 웃게 되었다.
소리는 처절하지만 성질은 여린 고라니가 때때로 마당에 다녀가는 모양이다. 쌈채소들이 포기째 사라지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 데이지꽃도 잡수시나. 데이지꽃이 한창인 유월 아침,하얀꽃송이가 드문드문 사라져 줄기만 남아 있는 꼴이 보였다.그로테스크하달까,보기는 좀 그렇지만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멧돼지도 마찬가지다. 봄부터 여기저기 구덩이를 퍽퍽 파놓고 다니는 녀석들. 특히 비탈길 아래 돼지감자가 자라는 밭은 거의 날마다 파헤쳐졌다. 힘이 어찌나 좋으신지.굴삭기로 팠나 할 정도로땅속 돌덩이들까지 마구 퍼올려져 있었다. 돼지감자는 환장하게 좋아하고갈대나 칡뿌리는 그럭저럭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 할 대상이다. 얼마 전엔감자밭도 일부 들쑤시고 지나갔다. 도톰한 잎이 짙푸르게 오르던 감자 줄기들이축 늘어져 있었다.데이지꽃이 무더기로 사라지고 감자밭이 다시 파헤쳐진다 해도 할 수 없다.자연에겐 화를 낼 수 없으니.
풀이 빈틈없이 땅을 덮고 숲이 우거지는 나날. 연신 뻗어 나오는 줄기와 더욱 짙어지는 푸른 잎들로 세상은 가득 차고 있다.한치도 머뭇거릴 새 없이 나아가는 푸른 행진을 보는 것 같다. 그 활기에 이끌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작물을 돌보고,거두고,풀을 맨다. 허리를 펼 겸 가까운 산마루까지 천천히 걷기도 한다. 숲도 푸르고 하늘도 푸른 초여름. 푸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일색인 듯 보이나 저마다 제가 지닌 속도와 성미대로 푸르다. 푸름과 푸름이 겹쳐 숲은 어둠처럼 깊어진다.
푸름 속에 깃든 생명들 움직임도 많아졌다. 날고, 기고, 파고들고, 뛰어다닌다. 생명이 무더기로 다가오는 느낌은 두렵기도 하고살아 있는 게 이렇게 많다니, 질리기도 한다. 제 나름대로 정교한 구조와 본능에 따라 그저 살아갈 뿐인 수많은 생명. 그 생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삼켜야만 생은 계속된다. 생명 현상은 우주에서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한다. 내가 즐겨 읽는 책의 저자인한 물리학자 말에 의하면 그렇다.생물은 지구 표면에 살짝 묻어 있는 정도라고.그 드문 현상에 내가 속해 있다,라고 생각해도 별 감정은 일지 않는다.
책을 통해얼핏 상상해 보아도 우주란 도무지 모를 세계다. 모든 것이 그 세계에 속해 있고 나도 그 일부분인데어째서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때가 되면 수컷들이 울부짖고 암컷들이 그에 응해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 현상도 그렇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가 따로 없다. 일개 한 생명이 궁금해할 원리가 아닌지도 모른다. 푸른 생명으로 가득 찬 지금 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 한정된 시야와시간이라 해도 그렇게 가득 차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시작되고가득 차고 비워지고, 생의 곡선이 그러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