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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07. 2024
꽃이 피었네
이웃 문선 씨네 마당에 처음 보는 꽃이 피었다. 가늘가늘한 줄기 끝마다 날개 활짝 펼친 나비처럼 사뿐히 올라앉은 붉은 꽃. 마당 경계를 넘어가 개망초 가득한 들판까지 점점이 흘러가 있었다.
"예쁘죠? 꽃양귀비예요."
미처 보이지 않던 문선 씨가 저만치 밭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양귀비와 닮아 흔히 개양귀비라 불리는데 자신은 꽃양귀비라는 이름이 더 좋다, 하였다.
"네. 예뻐요. 빛깔이 어쩌면 저렇게……."
가늘가늘한 줄기 끝마다 한 송이씩 핀 모습도 그렇지만 꽃잎색이 아주 고혹적이었다. 비가 곧 쏟아질 듯 흐린 날, 넓은 들 하얀 개망초 꽃무리 속 한두 점씩 꼿꼿하게 떠 있는 선홍빛 꽃은 오래된 흑백사진의 부분 채색처럼 인상적이기도 했다. 옷이나 입술에 발그레한 채색을 한 그런 흑백사진.
"인주색 같죠."
문선 씨가 내 눈길을 따라 들판을 향하며 말했다. 인주색? 아, 도장 찍을 때 꾹꾹 눌러 묻히던 인주. 그러고 보니 정말 인주색을 닮았다. 요즘은 도장 찍는 일이 드물어 인주 본 지도 오래되었네. 어릴 때 보았던 한강변 노을과 공중전화도 인주빛이었지. 그런 기억을 떠올리자 오랜 추억을 소환하는 아련한 빛깔로도 여겨졌다.
"마당에 씨를 뿌렸더니 저렇게 멀리까지도 꽃을 피웠어요."
들판에 핀 것을 몇 포기 가져가 심어보라고 문선 씨가 권했다. 아름다운 조화를 깨트리는 것 같아 망설여졌지만 반가운 말이었다. 사실 꽃을 본 지는 꽤 여러 날째였고 그동안 오며 가며 늘 눈길이 갔던 터였다. 문선 씨가 삽을 들고 와 함께 파 준 것을 몇 포기 가져다 마당 울타리 곁에 심었다. 그날 곧 쏟아질 것 같던 비는 후둑후둑 뿌려지다 말았다. 며칠 땡볕이 이어지자 꼿꼿하던 꽃양귀비는 아주 생기를 잃었다. 괜히 옮겨 고생시켰네. 계속 물 부어줘도 소생할 기미 없더니 어느 아침 안갯속에 불현듯 꽃을 피웠다. 어마, 깜짝이야.
마당 입구에 옮겨 심은 꽃양귀비. 며칠 참혹하게 늘어져 있더니 놀랍게도 다시 꼿꼿해져 꽃을 피웠다. 올해는 장마가 유난히 늦어 계곡 바닥이 죄다 드러나더니 이제 비가 온다. 먼 계곡 물소리가 밤이면 가까이 다가들었다. 기상예보로는 7월 시작과 함께 줄곧 비가 내릴 것 같더니 지금까진 하루 걸러 하루씩 쏟아지는 정도다. 장마전선이 남쪽에 몰려 있나 보았다. 내가 사는 산골은 강원도 북쪽이다. 고맙게도 비는 밤에 많이 내리고 낮이면 간간이 볕이 지나간다. 더디게 자라던 작물들이 이제야 성큼 자라고 있다. 고추, 가지, 옥수수, 오이, 애호박, 땅콩, 도라지, 당귀, 고수, 루꼴라. 모처럼 비를 흠뻑 맞고는 서둘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느라 모두 분주해 보인다. 덕분에 오래도록 텃밭에 물 대던 일에서 벗어났다. 이제 한가하게 꽃구경이나 해 볼까.
땅을 보고 피는 고추꽃
가지꽃도 아래를 보고 핀다
옥수수 수꽃이 꼭대기에 핀 뒤 사나흘 뒤엔 옥수수 암꽃이 잎겨드랑이에 핀다
오이꽃
애호박꽃
땅콩꽃
도라지꽃
당귀꽃
한가하게 꽃구경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비가 시작된 뒤 갑자기 무성해진 작물들에 모두 지지대를 세워야 했다. 고추, 청양고추, 꽈리고추, 도라지, 가지 들은 고춧대를 박아 집개로 고정하고, 청오이, 백오이, 토종오이, 애호박 넝쿨도 순치기를 한 뒤 지지대와 끈에 매달았다. 포도잎이 점령한 미니하우스에 더부살이하는 작두콩도 뻗을 길을 잡아주었다. 마당 아래쪽도 급했다. 유일한 출입구인 비탈길에 빗물 머금고 축축 엎어진 풀이며 늘어진 나뭇가지들도 쳐내고, 한창 꽃이 맺히고 있는 우물가 웨딩캔들과 그 맞은편에 무더기로 모여 자라는 해바라기에도 지지대를 대어 주었다. 해바라기 너머엔 호박밭과 감자밭이 있다. 빗물에 번들번들 젖은 호박잎은 우산으로 써도 될 정도로 커졌고, 아직 조금 더 자라야 할 감자는 꽃 피우다 말고 줄기들이 죄다 통곡하듯 엎드렸다.
우물가에 핀 웨딩캔들. 곧게 자라는 긴 줄기에 꽃송이가 촘촘이 맺혀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새로운 꽃을 피운다. 씨가 떨어져 다시 자라기에 해마다 볼 수 있다. 
마당 옥수수밭에 어쩌다 끼어들어 꽃을 피운 해바라기. 우물가에 가득 심은 해바라기는 아직 꽃 피우기 전이다.
자주꽃 핀 자주감자
맷돌호박꽃. 호박꽃이 필 무렵엔 늘 장마가 져서 열매가 맺히지 않고 잎만 무성했는데 올해는 어떨지.산 중턱에 집을 짓고 땅을 지니고 살면서 특별히 꽃모종이나 꽃씨를 산 적은 없다. 그래도 해마다 새로운 꽃이 모여들었다. 모종이나 씨앗을 이웃이 나눠주기도 했고 가족과 지인이 방문할 때 가져오기도 했다. 주변 수많은 풀과 나무들도 때가 되면 모두 꽃을 피웠다. 미처 바라볼 새도 없이 피고 지는 꽃들. 올해는 꽃양귀비와 함께 또 새로운 꽃이 왔다. "뭐가 필지는 나도 몰라요." 하며 봄에 마을 반장님이 모종으로 나눠 준 꽃이다. 무슨 꽃인지 모르는 채로 우물가 웨딩캔들 곁에 심었다. 주변 흔한 풀과 다르지 않은 자그마한 모종 다섯 포기. 부엽토를 푹신하게 깔고 특별관리 했건만 통 자라질 않더니 자그마한 채로 꽃을 피웠다. 바람개비처럼 생긴 진분홍 꽃. 꽃 사진을 찍어 검색했더니 일일초라고 했다. 날마다 꽃을 피워 일일초라고.
무엇이 필까... 설레는 기다림을 준 일일초꽃앞으로 비가 얼마나 더 올 건지, 자주 기상예보를 확인하고 밖을 내다보지만 알 수 없다. 장맛비치고는 변덕이 심하다. 예전 장맛비는 참을 수 없이 후덥지근한 기운이 차오른다 싶으면 쑤아--- 시원하게 쏟아지며 한동안 줄기차게 내렸던 것 같은데 이번 장마는 강한 바람을 동반해서인지 꼭 가을 태풍이 올 때와 비슷하다. 수시로 기상 상태도 바뀐다. 비와 바람이 함께 휘몰아쳐 왔다가 쓰윽 멀어지고 다시 또 후다닥 달려온다. 밤이면 숲을 휘어잡고 창문 들썩여대는 바람 소리가 으스스할 정도인데 굵은 빗방울까지 마구 지붕을 두들겨대면 잠을 설칠 수밖에 없다.
지난밤에도 바람이 엄청났다. 혹시 태풍이 오는 건가 검색까지 해 보았다. 필리핀해상 쪽 저기압이 태풍으로 발달할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 발생한 태풍은 없다 했다. 마음을 졸이게 하는 사나운 날씨에 고무되어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다. 워낙 비 오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땐 가방에 우산이 있어도 그냥 비를 맞고 다녔다. 가끔 우산 쓰고 지나가던 사람이 우산을 씌워주기도 했는데 거절하기 참 곤란했다. 꽃양귀비 인주빛처럼 아련하고도 선연한 시절이었네. 그때도 꽃은 늘 피었겠지.
집 주변에 가장 많이 피는 꽃은 역시 개망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