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허기란 나그네의 심정으로 다가온다
새벽에 깨면 종종 배가 고프다. 나이 들어 생긴 현상이다.
대략 두 시나 세 시 경의, 다시 잠들기는 어렵고 잠을 털고 일어나기엔 기운이 모자란 시각. 배가 고파 잠이 깬 건지, 덜 채운 잠이 헛헛증을 부른 건지는 알 수 없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본다. 잠든 척 자신을 속여보기도 한다. 한두 시간을 버티다 과감히 일어난다. 새벽의 허기란 나그네의 심정으로 다가오기에, 간이역에 내려 후루룩 마시는 가락국수처럼 뜨끈한 국물이 있어야 한다.
냄비 두 개를 꺼낸다. 냄비 하나에 물을 담아 불에 올린다. 다른 냄비엔 들기름을 쪼록 붓고 채 썬 마늘 한 줌을 약한 불에 살살 볶는다. 마늘이 익을 때쯤 애호박도 함께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인다. 말린 다시마나 미역 같은 게 있으면 같이 넣어도 좋지만 새벽의 기분엔 맞지 않아 생략한다.
국물이 우러날 동안 국수를 삶는다. 빳빳한 국수 가닥을 냄비 속에 흩어놓고 젓가락으로 살살 이끌면 어느새 부드럽게 원을 그리면 따라온다. 그 느낌이 좋다. 세상의 성마르고 가파르던 것들이 일순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일정한 방향으로 감겨오는 하얀 타래를 무연히 바라본다. 나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국수를 젓고 있구나, 싶다. 새벽 세시엔 국수 냄비에서 우주를 보기도 한다. 저 알 수 없는 질서 속에 우리가 있는 거겠지. 우주는 날마다 소멸하고 보완되고 새로운 입자가 태어난다. 날마다 새로 만난 내 몸도 서로에게 인사를 한다. 매끄러운 하얀 가닥들이 냄비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순간이 온다. 국물 냄비에서도 좋은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마음이 수굿해지고 상념이 사라진다. 이제 한 눈 팔 일은 없다. 국수를 찬물에 헹구고 건져 뽀얗게 우러난 국물 냄비에 넣는다. 새벽엔 면발의 탄력보다는 하얗게 김을 올리는 온도가 중요하다. 불을 끄고 그릇에 덜어 향이 좋은 채소 한 줌과 자른 김을 올린다. 양념간장이 있다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채우지 못한 잠의 허기를 위로하는 따끈한 새벽 국수다.
(詩) 말없는 국수가게
말없는 국수 가게를 내고 싶다.
어느 역에선가 잠시 멈춰 선 기차 한 량 같은,
혹은 유년의 기억 속 어둑한 골목 같은 좁고 긴 가게.
흙의 품을 가진 투박한 막사발에
다소곳이 사려진 밀과 볕의 다정한 생애.
흩어지고 모이며 모든 것을 지나온 지상의 물 한 바가지에
태고 적 바다의 깊이가 스민 짙푸른 다시마 한 줄기를 넣어
오래도록 우린 비릿하고 구수한 국물.
국수 한 사발에 담긴
들과 볕과 물.
먹는 것은 이 모두를 대하는 일이다.
마주 앉아 나그네의 말 몇 마디를 섞기보다는
홀로 앉아 경건할 일이다.
말없는 국수 가게를 내고 싶다.
길 위의 사람이 허기를 느껴 들어와 앉으면
아무런 말없이
김이 오르는 따끈한 국수 한 사발을
그 앞에 놓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