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도 고통을 느낄까?”
어제 땅콩죽 끓이려고 꺼내놓은 땅콩을 보며 동생이 말했다.
“땅콩이?”
“여기서 싹이 나온다며. 봄에 언니가 땅콩 싹 내서 텃밭에 심었잖아. 그게 얘네들 아냐?”
“맞아. 혹시 싶어 두었더니 싹이 나오더라.”
내가 대답했다. 그때도 땅콩죽 끓이려고 물에 불린 것을 대여섯 개 오목한 접시에 옮겨 본 것이었다. 땅콩죽은 생땅콩으로 끓여야 좀 더 고소하고 맛있다. 냉장고 문짝 위쪽에 넣어 둔 것이라 한참 잊었다가 발견한 것인데 싹이 돋아 신통했다.
“싹이 나온다는 건 생명이 있다는 거고, 생명은 소멸할 때 고통이 따르잖아. 그럼 얘네도 그럴 거 아냐. 믹서기에 넣고 막 갈아질 때나 뜨거운 물에 삶아질 때나.”
“살아 있으니 뭔가 느끼기야 하겠지만 고통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말라 있을 땐 생의 활동이 정지되어 있는 거고, 적당한 조건을 만나 발아를 하기 전까지 거의 무생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니까.”
내가 말했다.
“그럼 무생물과 생물의 경계에 있는 거네. 땅콩의 입장에서 보면 싹을 틔우는 거보단 그 편이 낫겠다. 고통도 모르고 안정적이니까.”
요즘 동생 입에서 나오는 말이 대체로 이렇다. 우울한 것이다. 지난달 마당 어미 고양이가 다리를 다쳐 수차례 병원을 다녀왔다. 고양이과의 다른 야생동물에게 다리 한쪽을 물린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빨 자국이 꽤 깊숙해서 주변을 넓게 괴사시킬 정도로 심각했다. 어미 고양이를 그때부터 작은방에 두고 계속 소독을 하고 약을 먹이고 돌보느라 동생은 잠도 설치고 입맛까지 잃었다. 나로선 뭔가 기운 나는 걸 동생에게 먹여야 해서 땅콩죽이나마 끓이게 된 것이다.
땅콩죽은 먹는 동생이 볶은 땅콩은 먹지 않는다. 먹으면 속이 답답하다고 했다. 나도 그런 편이었는데 요즘은 달라졌다. 땅콩이 없으면 새벽이 힘들다. 얼마 전 온라인 쇼핑몰에서 땅콩 사진을 보는 순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몬드와 함께 구입을 한 뒤로 그렇다. 지금까지는 견과류 중 아몬드만 즐겨먹었다. 동생과 아침이면 꼭 커피 한 잔을 같이 하는데 그때 반드시 곁들여 먹는 게 아몬드다. 아몬드를 먹으며 커피를 마시면 맛과 향이 두 배 정도는 좋게 느껴진다. 아몬드 역시 따로 먹을 때보단 커피와 곁들여 먹을 때가 더 맛있다. 나만 그런 가 했는데 동생도 마찬가지여서 우리에게 '커피와 아몬드' 그 조합은 기분 좋은 이미지다. 뭔가 기운을 내고 싶을 때 우리는 종종 말한다. 커피와 아몬드를 생각하자고.
그런데 이제 내겐 땅콩도 그렇다. 오랜만에 먹어 본 땅콩은 속을 답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특히 너무 이른 새벽에 눈이 떠져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을 때, 그 낭패스러운 헛헛함에 땅콩은 위로와도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다독다독 속을 채워주는 것이다. 땅콩과 어울리는 건 커피보다는 따끈한 물 한 컵이다. 땅콩 몇 알 먹고 따끈한 물을 마시면 잠 못 잔 울적함이 누그러졌다. 운이 좋으면 다시 잠이 찾아오기도 했다.
땅콩엔 마음의 안정과 불면에 도움을 주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검색을 하면 그 밖에도 좋은 점이 줄줄이 나온다. 혈관도 튼튼하게 해 주고 근육도 키워주고 눈도 밝힌다는. 그중 내가 원하는 것만 기억에 집어넣는다. 불면에 좋군. 기분도 좋아지게 해 주는군. 만족스러워 땅콩 몇 알을 더 먹는다. 입에서 맞으면 소화도 잘 되는지 이젠 땅콩을 먹어도 속이 거북하지 않다. 내 몸에서 필요로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이 들어가며 몸에 필요한 것도 달라지는가 싶다. 새로운 것들이 입맛에 추가되기도 하고 제거되기도 한다.
새벽이면 깨어나 자꾸 무언가를 먹는 것도 새로운 현상이다. 불면의 양상이 달라졌다. 원래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편이라 늘 애를 먹었는데 몸이 아주 괴롭지 않으면 그럭저럭 불면도 즐길만한 것이었다.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간간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작년 가을 가까웠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내 불면은 고통이 되었다. 겨우 잠들면 한 시간 만에 깨어났다. 그리고 그 어쩌지 못하는 새벽, 허기증이 찾아왔다. 새벽에 그래서 곧잘 된장국을 끓이고 미역국도 끓였다. 워낙 추웠기에 뜨거운 국물을 원했던 건지 마음의 허기를 없애려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난방 시설이 햇볕과 장작난로가 고작인 이 산골에서 겨우내 난로를 거의 지피기 않고 버티던 중이었다. 몸의 고통으로 정신의 고통을 덮고 싶기도 했고, 우리에게 장작을 마련해주던 그 떠난 친구를 나름으로 기리는 방법이기도 했다. 한동안은 제대로 된 음식을 거부하는 마음도 생겼다. 몇 달간 검은 구멍이 나 있는 시리얼만 먹었다. 평소 시리얼 같은 건 산 적도 없는데 그땐 그랬다. 읍내 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한 자그마한 도넛 모양을 한 시리얼. 그 수많은 구멍을 삼키며 새벽의 토막 난 시간들을 지나왔다. 그러니 내 새벽의 허기는 도넛의 구멍처럼 환상이다. 환상이라고 여긴다. 환상이라 해도 그것 말고는 대책이 없었다.
종종 내가 쓰는 이야기의 끝이 환상으로 빠지는 건 그것이 아니면 끝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환상이 아니라면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현실은 환상보다 더 지독한 환상이라 끝이 없다. 지금의 코로나 19도 환상을 씌워야만 끝을 낼 수 있는 것일까. 내일이 추석인데 이번엔 부모님 댁에도 가지 못한다. 동생과 나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 모이지 않기로 했다. 딸애에게도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다. 올해 초 그것이 퍼지기 시작할 때만 해도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도록 가족조차 만날 수 없게 만들 줄은 몰랐다.
어쩌면 우리 모두 진정한 휴식을 취해야 할 때인가 싶다. 제대로 쉬어야 알 수 있다.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공기나 물, 볕 같은 것도 그렇고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그렇다. 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릴 때 언니의 둘째가 그런 말을 했다. “이모, 푹 쉬고 싶은데 어떤 게 푹 쉬는 건지 모르겠어.” 고작 다섯 살 아이가 한숨처럼 그 말을 뱉으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방법을 알려줄 수 없었다. 나는 쉬고 있는가. 그 뒤로 종종 진단을 해보게 되었다. 의자에 몸을 묻는다고 휴식은 아니었다. 제대로 쉴 땐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는 인간. 휴(休). 한자의 생긴 모양은 그렇다. 숲길을 걸으면 저절로 쉬어진다. 그 정도는 안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리고 요즘 땅콩을 먹고 있으면 쉬어진다. 바꿔 말해도 무리없다. 쉰다는 건 허기를 채우는 것이라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주인공은 허기를 느껴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진정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도 이만 자판을 덮고 땅콩 한 줌에 따끈한 물 한 잔 마셔야겠다. 땅콩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