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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숲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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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Jan 16. 2021

고양이와는 이혼할 수 없으니까

내 딸은 동거 중

  서울에서 혼자 사는 딸아이에게 가족이 생겼다. 흰색과 검은색 무늬가 있는 두 살 배기 암컷 고양이다. 지난가을부터니 함께 산 지 좀 됐다. 제 이모처럼 동물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다. 전부터 고양이와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꺼냈다. 그때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만류했다.

  “고양이와 함께 살려면 여러 조건이 맞아야 해. 우선 집이 열 평은 넘어야 하고, 자주 옮겨 다니지 않아야 하고, 청결에도 신경 써야 하고, 건강해야 해. 특히 호흡기 건강이 중요해. 여행은 포기해야 하고, 숙면도 취할 수 없어. 하는 일이나 사람 만나는 것, 일상의 습관까지, 그 모든 일에 고양이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거야.”

   딸은 호흡기가 약해 자주 비염에 걸리고, 털 알러지가 있어 동물을 만지면 대번에 재채기를 하며 눈이 붉어진다. 또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이라 청소 따위는 대범하게 미루기 일쑤고, 일에 필요한 온갖 잡동사니를 지니고 살고 있다. 집도 월세 계약에 따라 자주 옮겨야 한다. 더구나 프리랜서로 문화기획 일을 하기에 다른 지역을 오갈 일이 많다. 한 해에 한 번 이상은 해외에 나가거나 장기 여행도 잦은 편이다.

  “그런 거 다 따지다간 아무것도 못해.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런 것들은 저절로 맞춰지게 되어 있어. 상황에 따라 최선을 택하면 되잖아.”

   그때마다 딸의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보통 카톡으로 대화가 오갔다. 그래야 서로 흥분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정리해 전달할 수 있었다.   

  “마음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살면서 어떤 사정이 생길지 누가 알아. 지금 너는 한창 세상으로 나아가는 시기잖아. 새로운 기회가 다가올 수도 있고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일이 풀려갈 수도 있어.”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긴 문장을 주고받다 답답해지면 딸은 통화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그럼 난 언제 고양이와 살 수 있는 거야? 엄마 말대로라면 평생 예측불허의 삶이니 가능성이 제로잖아.”

  “나중에 어느 정도 정착을 하면 그땐 가능하지.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단 한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그런 시기가 올 거야. 이모와 내가 여기 정착한 것처럼.”

  내가 말했다.

  “그건 너무 먼 얘기잖아. 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엄마는 이모와 함께 있지만 나는 계속 혼자라고.”

  그런 말엔 순간 마음이 약해진다. 엄마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인지 정말 혼자인 것이 힘들어진 건지 잠시 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된다. 딸 주변에도 이제 하나 둘 짝을 이루는 친구들이 생겨날 때였다. 고양이보다는 동반자를 만나는 게 자연스러울 시기다. '혼자라는 걸 의식하는 걸 보면 곧 너에게 남자 친구가 생길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어 에둘러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안 돼. 고양이와 함께 사는 건 결혼을 하는 것보다 더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는 일이야.”

  “무슨! 엄만 과장이 심해.”

  “과장이 아니야. 사람과는 달라. 동물은 오직 나만 의지하잖아. 한번 받아들이면 어떤 곤란한 사정이 생겨도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거야. 결혼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어. 고양이와는 절대 이혼할 수 없으니까.”


  그런 통화를 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딸과 전화를 하게 되었다.  통화 중 수화기 너머로 야옹,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니? 집에 고양이가 있니?”

  설마 하면서도 나는 물었다. 영상을 틀어놓았거나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겠지 했다.

  “어, 그렇게 됐어. 엄마한텐 안 알리려고 했는데 우리 나비가 하필 지금 소리를 냈네, 헤헤.”

  딸이 머쓱한 투로 말했다.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된 거야? 같이 사는 거야?”

  나는 물었다.  

  “사실은 내가 임보를 하고 있어.”

  임보란 임시 보호를 줄인 말이다. 보호단체가 구조한 암컷 길 고양이를 돌보고 있다고 했다.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사정이 있어 두 달 남짓 대신 돌보는 중이라는 것이다.  

  “너 알러지 있잖아.”

  좁은 공간에서 털을 뿜는 고양이와 함께 있을 딸아이를 생각하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동생네 고양이를 만날 때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재채기를 쏟아내는 아이였다.  

  “어차피 요즘엔 늘 마스크 쓰잖아.”

  딸이 얄밉게 대답했다.

  “그리고 왠지 점점 괜찮아지는 거 같아. 얘랑 지내는 동안 체질이 바뀌고 있나? 아니면 얘랑 나랑 특별히 잘 맞는 건지도 몰라. 고양이들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하잖아. 그런데 처음부터 날 아주 좋아해서 착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거야.”

  내가 속 끓일 걸 모르지 않을 아이가 종알종알 고양이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말하고 싶은 걸 꽤 참았던 모양이었다. 딸애도 알고 있었다. 동생이 고양이를 돌보게 되면서 산골 생활이 많이 변했고 그 과정에 내가 힘들어했던 것을.

  “생명을 맡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한숨처럼 나오는 내 말을 딸애는 막았다. 자기도 충분히 알고 있고 책임을 다 할 거니 신경 쓰지 말라 했다.  

    “그래, 언닌 신경 쓰지 마. 고운비가 알아서 잘할 거야. 잠깐 같이 사는 건데 뭐. 어쨌든 좋은 일이잖아.”

  동생도 거들었다. 돌봄이 필요한 고양이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고운비가 하고 있으니 기특하다는 것이었다. 또 고양이와 같이 살 수 있을지 스스로 진단해 볼 기회도 될 수 있어 좋지 않으냐고도 했다.

   “잠깐이 아니야. 내가 걔를 몰라? 결국 입양하게 될 거야.”

  나는 장담했다. 한 생명을 맡고 돌보다가 보내는 일이 어찌 산뜻하게 마무리될 것인가. 고양이와 정이 들면 차마 보낼 수 없을 것이다.


   한 달 뒤 내가 우려하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 딸애는 결국 고양이를 입양하겠다고 했다.

  “당장은 사랑스럽고 좋겠지만 결국 힘든 일이 생겨. 아프고 다치고,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마음 아픈 이별을 할 텐데.”

  나는 상심해서 말했다. 당시 마당고양이 율무가 야생 동물에게 다리를 심하게 물려 나타나서 동생도 나도 무척 심란하고 힘든 상태였다.   

  “나도 알아. 율무 때문에 많이 힘든 거. 나도 그런 일 생기면 다 감당할 거야. 얼마 전에 우리 나비도 중성화 수술시켰거든. 수술할 때 정말 마음이 아프고 걱정됐지만 나는 그런 게 싫지 않아. 돌보면서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어. 내 손길과 애정이 너무나 필요한 생명을 돌보는 일. 엄마 말대로 나만을 오롯이 의지하는 그게 부담이 아니라 나는 감동스러웠어. 나중에 결국 이별하는 날이 오더라도 그런 게 삶인 거잖아. 그게 무서워 지금 이 아이를 떠나보내긴 싫어.”

     

우유 투입구를 내다보는 한 모금의 바다. 고운비 사진

   한동안 속을 끓였지만 할 수 없었다. 늘 마음 가는 대로 원하는 것을 하고 살라 응원해 왔으니 어쩌겠는가.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이제는 멀리 가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건강에도 더 신경 쓰겠지. 좋은 방향으로 나는 마음을 돌리고 있었다. 딸애도 내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깨끗이 정리된 집과 고양이 사진을 자주 카톡으로 보내왔다. 아침엔 일찍 깨어나게 되었고 날마다 청소도 즐겁게 하고 있다 했다. 한번은 고양이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비는 임시로 부른 것이라 이제 정식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고양이 사진을 자주 보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의 고양이에게 정을 들이려는 딸의 속셈인지도 몰랐다. 색깔 때문이겠지만 동생네 고양이 하루와 엇비슷했다. 하루의 어미인 숲 고양이 모리 생각도 났다. 날마다 동생과 함께 모리 밥 챙겨주는 일을 여러 해째 해오고 있다. 요즘처럼 추울 때면 더욱 애틋하고 마음 쓰이는, 그런 뭉클함이 어디 내가 아는 한두 고양이에게만 해당될 것인가.

     

내 부엌의 오래된 찻잔

  딸의 요청이 있은 며칠 뒤 고양이 이름을 정했다. 재미있게도 내 부엌에 있는 검은색 도자기 잔에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 모금의 바다.’ 딸이 태어나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아주 오래된 도자기였다. 삼십여 년 정도 되었을까. 그 시대 '그리운 성산포'를 노래한 시인 이생진의 시 제목이기도 했다. 딸애가 카톡 사진으로 보내온 고양이를 보다 어느 순간 어쩐지 그 오래된 찻잔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오! 닮았네, 닮았어.”

  동생도 딸도 단번에 그 이름을 수긍하여 반겼다. 고양이 꼬리와 찻잔 손잡이가 특히 닮았다고 했다. 새 이름으로 한 모금의 바다는 더욱 각별한 고양이가 되었다. 첫눈에 좋아하여 오래도록 지녀온 물건에 대한 정감은 물론 내 젊은 날의 향수까지 품은, 특별한 이름을 가진 고양이인 것이다.

     

한 모금의 바다와 고운비 발. 고운비 사진

  어제는 고운비의 생일이었다. 작년엔 고운비가 태국에 가 있어 함께하지 못했고 올해는 거리두기를 지키느라 마찬가지 상황이 되었다. 만나지 못하는 것은 서운하지만 위태로운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아침 열 시, 약속한 시각에 영상 통화를 했다. 고운비가 초콜릿 케이크 조각에 초를 꽂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한 조각은 우리와 함께 하려고 남겨 놓았다고 했다. 간식거리와 함께 차도 우려 놓고, 우리가 기뻐할 여러 선물도 보여주려고 옆에 준비해 놓고 있었다. 고양이와 살면서 확실히 더 꼼꼼하고 신중해졌다.

  “자, 여러분. 시작합니다.”

  고운비가 초에 불을 켰다. 동생과 나는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스마트폰 작은 화면의 영상이지만 조용한 산골에 돌연 활기가 돌았다. 동생은 고운비가 받은 선물 구경에 신이 났다.  찻잔과 털신, 모자, 책, 비누, 초콜릿. 특히 몽골스러운 모자에 반해서 나중 십 년 뒤엔 자기에게 꼭 물려달라고 미리 찜을 했다. 고운비는 리포터가 되어 옷장과 책장 구경을 시켜주고 작업실로 이동해 요즘 새로 하고 있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창을 열어 바깥의 좁은 골목과 멀리 내다보이는 대로도 보여주었다. 푸른색 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의 서울 풍경에 시골뜨기 우리 입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실제로 잠시 도시 구경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실컷 웃고 떠드는 중에 한 시간가량이 훌쩍 지나갔다. 영상으로도 이렇게 즐거운 모임이 될 수 있다니, 신기했다.

  통화를 마칠 즈음 고운비 무릎 위에 앉아 있던 한 모금의 바다 눈이 가늘가늘 감기고 있었다. 영상 파티 중 몇 번이나 우리의 환호성에 놀라고 고운비에게 입맞춤을 당하더니 곤한 모양이었다.

  "안녕! 엄마 이모."

  고운비가 잠에 빠져드는 아이의 발을 굳이 빼내어 같이 잡고 환하게 웃으며 흔들어댔다. 완전 순둥이 고양이였다. 산골의 우리도 바이바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 고운비.  안녕, 한 모금의 바다. 오래도록 둘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

  영상이 꺼지고 동생과 나는 잠시 시차 적응을 해야 했다. 지나치게 고요한 산골의 풍경이 창밖에 있었다. 흐린 날씨, 이따금 마른 풀이 바람에 뒤척였다.    

  “아, 다행이다. ”

  침묵을 깨고 동생이 말했다.

  “그래. 마음이 놓여.”

  나도 말했다.

 

 순둥이 고양이 한 모금의 바다
고운비와 한 침대 쓰는 한 모금의 바다
오래도록 둘이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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