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창에 '선유도 가는 길'을 입력하면 온갖 관련 글과 여러 방면의 복잡한 길 안내가 쏟아져 나온다. 많은 정보를 훑어가던 남자는 한 안내문에 눈길을 멈추었다.
선유도 가는 길. 당산역 1번 출구로 나가 한동안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사거리가 나오면 K은행 쪽으로 건너 오른쪽 길로 또 얼마간 걸어갑니다. 이 길이 맞나 싶을 즈음 둥글게 떠있는 무지개다리, 선유교가 보일 것입니다. 조금 멀긴 하지만 무지개처럼 닿을 수 없는 곳은 아닙니다. 선유교에 올라 그대로 가기만 하면 선유도에 다다릅니다.
무지개처럼 닿을 수 없는 곳은 아닙니다. 남자가 가려는 선유도와 다른 이들의 선유도가 그 문장으로 구분되는 느낌이었다. 내일이면 남자도 그 말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내일 남자는 선유도에서 한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군산에도 같은 이름의 섬이 있지만 약속 장소의 섬은 서울 한강에 있는 섬이다.
남자가 사는 봄내시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로 한 시간 반이 걸린다. 남자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서울에 다녀오곤 하지만 선유도라는 섬이 있는 건 몰랐다. 좀 더 검색을 해 보았다. 선유도는 한강에 있는 세 섬 중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옛날에는 봉우리가 제법 높아 선유봉이라 불렸다. 오래전 대홍수가 났을 때 한강에 제방을 쌓느라 봉우리를 깎고, 그 위로 양화대교를 놓았다. 그 뒤 20여 년 정수장으로 쓰다 2002년부터는 정수시설의 오래된 건물을 활용하여 공원으로 만들었다. 낡은 건물과 그 위를 덮은 담쟁이와 줄사철 따위가 고대의 폐허 같은 독특한 정취를 풍긴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남자는 8시 10분 기차를 탔다. 여자와 선유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시각은 오전 11시 11분이었다. 11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창 밖의 습한 공기를 가르며 기차는 나아갔다. 밤낮의 기온차가 큰 시기라 아침이면 안개가 짙었다. 도시를 빠져나가자 이내 산과 들이 나타났다. 철도와 가까운 산기슭에 보랏빛 꽃을 가득 피운 오동나무가 보였다. 허공을 향해 핀 꽃송이가 어딘지 주술적으로 느껴졌다. 왼쪽으로 강이 나타났다. 산과 강 사이로 물안개가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모내기철이라 물이 차있는 논마다 산이 고요히 들어앉아 있었다. 밭엔 검은 비닐을 덮은 이랑 위로 푸른 감자가 줄 맞춰 자라고,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대파는 둥근 꽃을 튼실하게 매달고 있었다.
터널 몇 개를 지나자 강은 위치를 바꿔 오른쪽으로 나타났다. 짙은 안개에 나무들은 젖어 있는 듯 보였다. 강물 속에도 젖은 나무와 산이 있고, 이따금 모텔과 카페가 지나가고, 차가 달렸다. 강을 따라 기차도 안개도 모두 흘러가고 있었다. 그 흐름은 자신만 정지해 있다는 느낌을 남자에게 주었다. 새벽 강에 홀로 나와 찬물에 얼굴을 씻는 기분이기도 했다.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마음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아까부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뱃속 깊이 자막처럼 지나가는 노래라 겉으로 흘러나오진 않았다. 오래전 자주 들었던 ‘북한강에서’라는 노래였다.
오전 11시가 못되어 남자는 선유교 앞에 도착했다. 다시 나타난 강은 거대한 폭으로 넓어져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강의 흐름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오가는 차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차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올 때도 그랬다. 스쳐가던 겹겹의 사람들 모두 정지한 듯 여겨졌다. 이제 흐르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걸 남자는 깨달았다. 그 흐름 끝에 여자가 나타났다. 멀리서 조금씩 형체를 갖추며 차츰 선명히 다가오는 여자를 남자는 지켜보았다.
"몰라보겠다."
막 도착한 여자가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런데 나인걸 어떻게 알았어?"
남자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달라져봤자 뭐, 알 수 있지."
여자도 빙긋 웃었다.
"아주 다른 것이 되었다 해도?"
남자가 얼마간 심술궂은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응. 알 수 있어."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가령 나무나 돌 같은 게 되었다 해도."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여전하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의 말 한마디에 오랜 세월이 단박에 물러나고 있었다.
"22년 만인가."
앞장서서 선유교로 오르며 여자가 말했다.
" 22년 8개월."
남자도 여자를 따라 다리 위로 걸음을 내딛으며 대꾸했다.
선유도 강변엔 버드나무가 많았다. 솜털을 단 씨앗이 온갖 곳에 내려앉았고, 허공에도 가득 날고 있었다. 수생식물이 자라는 물 위에도, 풀숲에도, 꽃송이 위에도 하얀 솜이 덮였다. 담쟁이넝쿨이 휘감은 오래된 건물 어느 구석에 누군가 주술에 걸려 있는지도 몰랐다. 억겁의 세월 솜을 틀고 있어야 하는.
"오래전 읽다 접어둔 책을 다시 편 것 같지 않니, 여기도 우리도."
여자가 말했다. 둘은 시간의 정원이라는 곳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너진 담장과 담쟁이넝쿨. 시간이 스며들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아주 온 거야?"
남자가 물었다.
"모르겠어."
대답한 뒤 잠시 말없이 여자는 걷기만 했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
한참 만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카페테리아라고 쓰인 건물 앞에서 둘은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도 벽마다 담쟁이넝쿨이 덮이고 하얀 씨앗이 날고 있었다. 포테이토 피자와 커피를 주문해 둘은 야외탁자 앞에 앉았다.
"우선은 아버지 때문에."
피자를 얼마간 먹다 말고 여자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당분간 있어야 할 것 같아. 밤마다 아버지 팔짱을 끼고 산책을 해. 엄마가 몇 달째 그 일을 했어. 이젠 엄마도 병이 날 지경이라."
"밤에 산책을?"
남자가 물었다.
"응, 산책. 안방에서 마루로, 발코니로, 주방으로. 그런 식으로 밤새, 멈추시질 않아. 오늘도 아침까지 그랬어. 날이 밝으면 그제야 주무셔."
남자는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
"기차 타고 왔겠네"
여자가 물었다.
"응. 아침 8시 10분 기차. 강에 안개가 많더라."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 기찻길 걸었던 거 생각나?"
여자가 다시 물었다.
"그래. 백마라는 곳에 가려다 중간에 기차에서 내렸지."
남자가 말했다.
역마다 일일이 서던 완행열차였다. 표를 내고 입구로 나가는 대신 여자는 떠난 기차를 따라 레일 위를 걸어갔다. 기찻길을 걷는 것은 불법이었다. 금방이라도 역무원이 달려올 것 같아 남자는 여자를 가리듯 바짝 뒤를 따랐다. 기찻길 양편으론 온통 억새밭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억새의 흰빛이 해거름 빛을 반사해 눈이 부셨다. 가늘게 뜬 남자의 눈에 레일을 밟고 가는 여자의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여자는 마치 레일이 아니라 벼랑 위를 아슬아슬 발끝으로 딛고 가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상하지. 너와 만나면 왜 나를 만난 기분이 들지?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여자가 말했다.
"그래서 불편하다고 했지. 기억 나. 넌 나를 만나면 항상 떠나고 싶어 했고, 떠나서는 또 돌아오고 싶어 했어."
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가까운 것도 멀어지는 것도 못 견뎌하던 여자였다.
"우린 어디로……."
말을 하던 여자가 갑자기 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순식간 얼굴이 붉어지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황급히 일어섰다. 버드나무 씨앗이라도 삼킨 모양이었다. 마실 것을 찾았지만 탁자 위의 커피 잔은 둘 다 비어 있었다.
"물 사 올게."
카페테리아 건물 안에 편의점이 있는 걸 보았다. 여자가 손을 내저었다. 기침을 참으며 여자는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다시 기침이 터졌다.
"금방 다녀올게."
남자가 몸을 돌려 편의점으로 향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기침소리가 남자의 목안을 타게 했다.
남자가 생수 한 병을 들고 야외 탁자로 나왔을 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화장실에라도 간 것인가 싶었다. 잠시 여자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남자는 다시 건물로 들어가 맥주 두 병을 사 왔다. 맥주를 마시며 멀리 강 위에 걸쳐진 대교를 바라보았다.
"양화, 버드나무 꽃이야, 저 다리 이름."
공원에 막 들어왔을 때 여자는 대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해주었다.
하얀 날개를 단 씨앗들이 강 위를 날고 있었다. 물 위에 떨어진 씨앗은 어디까지 흘러가 다시 나무가 되는 것일까. 자신의 생각이지만 여자가 하려던 말 같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로, 여자의 다음 말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남자는 눈 앞의 풍경을 보며 조금씩 맥주를 삼켰다. 어떤 말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울 건 없었다. 해마다 버드나무가 씨를 만들고, 씨가 멀리멀리 흘러간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어쩐지 여자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정태춘 <북한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