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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Oct 20. 2019

내 프랑스 남자 친구의 여자 사람 친구 - ①

액션 씬 중에서도 으뜸은 이것이다

이 문제는 이미 극복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을 때 화가 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기초로 사고하며 한국어를 통해 교육받았다. 아주 보수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소위 말하는 '오픈 마인드'이지도 않다.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이 적당히 꼰대 같고 적당히 진보적이라서 가끔 꼰대 부분이 잠에서 깨어나면 능력껏 입을 틀어막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해두겠다. 

 이번 에피소드는 사실 그냥 묻어야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배제하고 사실만 적어도 다니엘이 쓰레기 자식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한국의 보통 젊은이들 눈에 내게 있었던 일들이 어떻게 보일지 아플 만큼 잘 알아서 이걸 굳이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은 했다. 나는 우리가 만나면서 힘든 부분이 어땠고 우리가 어떻게 극복을 하려 노력했는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지금 잘 만나는 연인과 싸웠던(그리고 지금은 끝난 일들로) 것 때문에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매도하고 재판대에 세우려고 시간을 들여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욕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냥 다니엘의 뒤통수를 치고 이 개 아들놈아!라고 욕을 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아멜리나 다니엘을 해하고 싶었던 거라면 글을 쓰기보다는 양말에 자잘한 레고들을 넣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지만 진지하게 부탁드리고 싶다. 1화만 보면 다니엘이 여러 의미로 어마어마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지만, 그래서 '댁의 연애 뒤로 어떤 내용이 이어져도 그건 이 사람과 헤어지지 않고 곁에 남아 사랑하길 택한 댁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이 문제를 극복했고,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로 다니엘을 성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꼭!!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 아멜리도 마찬가지다. 누가 밉기 때문에, 누굴 욕하려고 쓰는 게 절대 아니다. 진지하게 드리는 부탁이다. 거기에 이 에피소드를 기어이 쓰고야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 에피소드가 작년 중순부터 올해 초까지 내가 진지한 마음으로 이별을 고려하게 만든 주 요인중 하나여서다. 지금 연애 이야길 쓰면서 이 논쟁을 배제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문제의 아멜리와 나는 그냥저냥 잘 지낸다. 처음부터 아멜리와 마찰, 신경전 같은 건 없었다. 내가 화가 났던 건 다니엘의 완고한 태도였지 아멜리는(다니엘도 그런 적 없다.) 선을 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어서다. 지난번엔 다니엘이 없을 때 그녀를 집에 불러서 밥을 먹이고(이 부분에서 어이구, 등신아!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같이 책도 읽고 내 카메라 구경도 하고 사진 이야기도 많이 했다. 정말 귀찮은 일인데 내가 아직 프랑스어를 못하는 탓에 내 책의 말칸 하나하나를 읽고 영어로 어떤 뜻인지 알려주는 그녀에게 감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멜리는 다니엘의 친구들 중에서 제일 '내 친구'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내 친구'가 아니라 '나랑 제일 친한 다니엘의 친구'다. 하지만 앞으로 아멜리랑 내가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형태로 친구가 되어갈지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우리는 이런 사이다. 

프랑스식 연애와 한국식 연애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실 사귄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우리가, 서로의 차이에 관해 얼마만큼 알고, 또 무엇을 모르는지는 전혀 모른다. 아마 내가 프랑스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 C네 커플 일로 대화를 하다가 다니엘과 내가 '파트너의 이성 친구'에 관해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헤어진 지 몇 달이 지난 상태였을 것이다. 나는 이 '파트너의 이성 친구' 문제로 꽤 오랜 시간을 고통받았고, 작년 말에는 정말 완전히 지쳐서 '내가 떠나면 다니엘이 잘 살았으면 좋겠고 난 할 수 있는 모든 것 이상의 노력을 했는데 기본적으로 뇌구조가 다른 것 같으니까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C네 커플 일로 우리-주로 내 쪽-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에피소드 막판에 다뤄보겠다.

한국에서 지내던 시절 나는 만나는 사람한테 이성인 친구가 있어도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나 풍기면서 나를 기만하지만 않으면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어떤 부부가 말하길, 자기 부부는 상대방이 이성과 1) 밤에, 2) 단둘이, 3) 술을 중에서 2가지 조건 이상 만족시키지 않는 한은 노터치라고 했었는데 그걸 보고 꽤나 명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고방식이 꽤나 '쿨'하다고 느꼈고 자랑스럽게 느끼기까지 했다. 

그리고 2016년 찾은 프랑스는 나에게 대환장을 선사했다.


 문제의 시작은 나와 다니엘이 한창 떨어져 있었던 연애 초기였다. 어느 날 다니엘이 '어, 아멜리 집에서 묵었어. (영화 이름) 보고 그냥 TV 쇼 같은 거 얘기하면서 놀았어.'라고 얘기했었다. 그 때 시간이 몇 시더라, 프랑스는 새벽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순간 나는 '뭐지? 미친놈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연애 초기의 우리는 서로한테 많이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 가식의 결정체였기-그럴 그릇도 못 되는 주제에-때문에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물론 이 문제로 싸움이 반복되면서는 당연히 이때 헤어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이 나를 배신했을 거라고 굳게 믿어서는 아니었고, 이 시점에서 이미 서로 가치관이 2억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뻔한데 그걸 확인하고도 대화하려 하거나 결론을 내려하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웠다. 사귀기 전부터 다니엘이 아멜리, 마티유 두 친구와 제일 친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는데 나와 내 남자인 친구들은 서로 만나는 사람이 생기면 각자 지들이 알아서 조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니엘도 그래 줄 것을 기대했다. 그 후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아멜리 일을 소중한 5.9인치 포를 장전하듯 적당한 곳에 묻어두었다. 


 이 '여사친' 문제가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아멜리를 초대하려 할 때였다. 다니엘은 우리가 아멜리를 초대하려 하기 전부터 시간 약속을 느슨하게 잡는 경향이 있었다. 파리의 어떤 젊은이들은 가령 약속을 잡고, 약속 당일에 한번 더 연락을 해서 '우리 오늘 베트남 음식 먹으러 가기로 한 거 아직 유효하지?'라고 확인하지 않으면 취소된 거라고 생각한다. 직장 점심 약속도 너무 미리부터 잡으려 하지 않고, 설령 미리 잡아도 당일에 다시 확인한다. 유럽 동료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나는 '아니 약속을 잡았으면 당연히 만난다는 게 기본 전제여야지 왜 깰 것을 전제로 약속을 잡지 미친놈들인가?'라고 생각했었으나 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라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남자 친구라는 작자가 당일 확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연히 취소된 건 줄 알았지'라고 말하는 꼬라지는 시퍼런 두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불같이 화를 냈다. 친구들과 잡는 약속에서도 '나는 약속 당일 2시간 전에 고작 지가 피곤하고 갑자기 너무 귀찮다는 이유로 약속 취소하는 인간들이랑은 상종도 하기 싫다'라고 못 박았었다. '그건 너네 규칙이지 내 규칙이 아니니까 그렇게 느슨-허게 약속을 할 거면 나를 끼워 넣지 말라'고도했다. 다니엘은 내 강경한 태도에 대단히 행복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아니었다. 지금도 다니엘이 단순히 잊어버렸던 건지 그냥 상관을 안 한 건지 아니면 바보였던 건지 잘 모르겠다. 

 문제의 그날 다니엘은 천진한 태도로 또 내 혈압을 정상범위 최고혈압보다 40mmHg  정도는 올려놓았다. "어 아멜리가 오긴 올 건데, 오늘 다른 친구들 만나느라 안 올 수도 있어." (그래도 여기까진 참았다. 니가 내 가족이었으면 따귀와 늘어난 수명 맛을 봤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어 근데 올지 안 올지 모르겠으면 약속을 안 잡는 게 맞는 거겠지?"라고 말했으나 다이내믹 요지경의 도시 파리에서는 이런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약속 방식이 꼭 욕을 먹지만은 않는 듯도 하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핏대를 세워 가며 참았지만 다니엘이 내 학부 시절 김모 교수님의 광고 마케팅 기획(2) 시간에 만난 팀원 전체보다 더 멍청한 얼굴로 "메뉴는 자기가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했을 땐 매 시간 조별과제계의 원맨 아미가 되어야 했던 과거가 떠오르면서 치솟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 약속을 저런 식으로 잡는다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짜증도 났지만 이 단계에서도 나는 아멜리에게 뭐라고 할 마음이 없었다. 아멜리야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알 길이 없고 자기야 하던 버릇대로 한 건데 화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화가 난 건 내가 이런 무질서로 가득한 약속 잡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해맑게 '내 친구는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고 정치인 같은 발언을 한 다니엘 때문이다.


* 웃기다면 웃긴 일이지만 프랑스 생활 초기 몇 개월 동안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심사가 뒤틀린 나머지 '좋아! 프랑스 친구는 한 명도 만들지 말아야겠군!'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건 좋지만 굳이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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