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던 돌파구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그렇다고 놓지도 못하는 시간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다니엘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2018년을 맞았고, 나와 다니엘이 이 문제에 관해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연히 내 친구 C네 커플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내 친구 커플의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나와 다니엘, 그리고 C와 C의 남자 친구는 종종 같이 식사를 하곤 해서 다니엘도 C의 남자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C의 남자 친구는 나를 '파트너인 C의 친구'보다는 '내 친구'의 한 사람으로 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C는 중국 사람이다. 나와 거의 같은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굳이 C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C의 남자 친구가 걸어오는 연락의 내용이 정말 별 대단한 게 아니어도 이 상황 자체가 C에게 있어 불편할 거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C의 남자 친구가 보내오는 사소한 일상 사진이나 농담은 내게 꽤나 불편한 것이었다. 거기에 그에게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건 C가 싫어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건-둘은 이미 이 문제로 오랜 기간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내가 과민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그가 C에게 가서 또 다른 말싸움을 벌일 계기가 되는 등 안 좋은 결말만 가져올 것 같아서 나는 우물쭈물하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러니까 상황은 이랬다.
-C는 프랑스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
-C의 남자 친구가 나를 비롯한 C의 여자인 친구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함
-C의 커플이 이미 이 문제로 많이 싸웠음에도 문제행동이 반복됨.
-C네 커플의 갈등과는 별개로 한국 출신인 나는 이 상황 자체가 C한테 죄스럽고 미안함.
C의 남자 친구가 보낸 메시지들은 정말 별것은 아니었다. 고양이 짤이나 그날 마신 술 사진-내가 술을 좋아해서-이나 뭐 그런 것이었지만 그는 내 절친인 C의 남자 친구였지 내 친구는 아니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내 친구'와 '내 친구의 연인'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다. 나는 나름대로 C에 대한 의리를 챙긴답시고 단답형으로 응하거나 대화를 최단 시간 안에 끝맺는데 사력을 다했다. 몇 달 후 둘은 이 문제로 크게 충돌했고, 나는 이 일을 전해 들은 다니엘이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하는 걸 듣고 머리가 띵했다.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다니엘은 C의 남자 친구가 보낸 메시지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근데 C의 남자 친구가 너한테 치근덕거린 건 아니잖아? 안 그래?"
"그리고 우리랑 C의 남자 친구는 몇 번 밥을 먹었잖아. 그러면 거의 뭐 친구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니야? 집에도 초대받았었는데? 이런 고양이 짤 같은 거 보낼 자유조차 없는 거야?"
여기서 나는 나와 다니엘의 문화가 보통 다른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만난 친구인 싱가포르 출신 디자이너 R에게 도움을 청했다. R은 내 친구라는 이유 때문에 내 쪽으로 치우친 의견을 줄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것도 있었고, 싱가포르는 또 다른지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R은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내가 내 애인이랑 사귀기 전부터 애인의 친구랑 알았더라면 뭐 굳이 내 애인한테 그, 애인의 친구랑 무슨 얘기했다고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만약에 그 제삼자인 친구를 나한테 소개해준 게 내 애인이라면 우리 둘이 얘기를 할 때 내 애인한테 말을 해 주는 게 맞지. 또 내가 그 제삼자인 친구랑 얼마나 친한 지도 영향을 미칠 것 같아. 둘이 뭐 엄청 친한데 짤방 같은 거 맨날 주고받으면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렇지! 이거거든!! 나는 R의 대답을 캡처해서 다니엘에게 보냈다. 뭐, 한국에서도 이 '여사친', '남사친'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개인차가 크겠지만 나한텐 이게 파트너를 향한 '존중'의 문제인데 다니엘한테는 그냥 '속박'이고 '질투'로만 보이면 이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동안 더 많이 상처 받을 거라는 사실은 뻔해 보였다. R의 답변을 본 다니엘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힌트를 얻은 나는 한번 더 허심탄회하게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우리 사이의 문화 차이를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싶어서 몇 가지 예시를 들어서 설명했다. 아래 번호가 붙은 단락들은 모두 내가 다니엘을 향해 말한 것들이다.
① 어떤 부부가 있다고 하자, 둘 다 한국인이야. 근데 둘 중 하나가 결혼의 의무에 성실하지 못했어 막 바람을 핀 거야. 둘은 결혼을 유지하기로 했지만 유책 배우자는 다시 신뢰를 얻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런 조건을 지키기로 합의했어. 1.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오기 2. 만약 일이 끝나고 회식 같은 일들이 있으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상 통화하기. 3. 님은 더 이상 님 친구들이랑 여행 같은 걸 갈 수 없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이 상황이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아. 있을 법한 일처럼 보여. 뭐 그냥 헤어지는 일도 많이 있지만 말이야.
- 다니엘: 근데 이게 나한텐 좀.. 뭐라고 해야 할까 유치하게도 보여. 평가질 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자기 삶의 파트너를 그렇게까지 믿지 않고, 그리고 질투라는 감정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이기도록 두는 것,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취향이나 행복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우선시한다는 거? 그걸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해서까지 충족하려 하는 거? 그게 좀 성숙하지 못한 사고방식 같아. 그러니까 이 예시에서 자기 배우자를 그렇게까지 못 믿으면 그냥 헤어지면 되는 거 아닌가? 한 사람은 여전히 엄청 화나 있고 한 사람은 막 만회하려고 저자세로 행동하는 거는 그냥 둘 모두를 향한 감정적 고문 아냐?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 바람 엄청 펴.. 내 말은 내 문화가 대척점에 있거나 그렇게 이상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거지.
② 내 생각에 우리 문화권에서 커플 간의 신용이라는 건 약간 은행 잔고 같은 느낌이야.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 때까진 꽤나 조심하는 편이고, 신뢰를 얻기 위해서 잘하고. 만약에 관계가 초기고 너무 이해하기 힘든 것만 아니라면 상대 이외의 '이성'을 대하는 데에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서로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해주는 편이고, 그러니까 신뢰가 처음부터 있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는 게 아냐. '쌓아 나간다'라고 보는 것에 더 가까워.
③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 우리나라에서 이런 질문 좀 자주 하거든. 물론 진지하지는 않고 장난으로. "나랑 네 절친 마티유랑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거야?-물론 마티유는 수영할 수 있으니까 나를 구하겠지만-" 근데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들으면 깔깔대고 웃는 대답은 "둘이 왜 같이 있어?"야. 그만큼 우리는 '내가 알아서 만난 친구'랑 '내 애인을 통해 만난 친구'를 다르게 대한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
④ 정말 다 그러는 건 아냐, 근데 한국에서 어떤 커플들은.. 만약 오늘 네가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러 가잖아, 그러면 이런 것들을 물어본단 말이야. '오늘 몇 시에 들어올 거야?', '거기에 여자인 사람 친구 있어?', '여자인 사람이 있는데 왜 가려고 그러지..?'. '걔네는 어디에서 만난 여자애들이야?', '거기에 여자애들 있잖아, 자정 전에 들어오고 집에 오면 연락해줘.'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들이랑 만나서 뭐 하는 동안 애인이 연락에 답장 안 하면 꽁하거나 그러는 경우도 있어. 나 정말 유세 부리려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냐. 내가 너한테 부탁한 건 두 가지잖아, '여사친네 집에서 자정 안 넘기기', '여사친들이랑만 여행 가지 않기', 이게 내가 자란 문화권에서는 이 두가지도 그렇게 쉽게 선뜻 나오는 얘기는 아니라는 거야. 난 내가 너한테 큰 거 해주고 있다고 뽐내려는 게 아니고 이게 나한테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 거야.
- 다니엘: 이제 나랑 아멜리랑 그런 식으로 친하게 지내는 게 너한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라는 걸 알겠어. 게다가 나한텐 당연한 일들이라 너는 불만 표출도 못하고 네가 열심히 노력한 것에 인정도 못 받고 지낸 게 정말 힘들었을 거라는 걸 알아. 프랑스에서는 이게.. 문화적으로 정말 다르게 접근해. 막 화내면서 "뭐?? 미쳤어?? 여사친네 집에서 잠을 쳐자셨어요 돌으셨나?" 이러는 걸 어... 전형적인...'너를 전혀 믿지 않고 네 삶을 통제하는 데 혈안이 되고 네 자유를 잡아 비틀어버릴 미친 애인' 느낌으로 바라봐... 엄청 다르지.. 프랑스 사람들은 좀 이렇게 생각해. '걔는 질투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고 그 병은 나를 노예로 만들 거야.' 이런 식으로. 그리고 내가 너한테 오늘 약속 있다고 누구 만나도 되냐고 묻는 거 다른 사람들이 알면 내가 굉장히 의존적이고 유아적이라고 생각하거든.. 아마 애들이 이렇게 말할 것 같아 "왜 걔가 네 삶을 통제하게 냅둬! 어?? 넌 잘못한 거 없어, 아멜리는 그냥 니 친한 친구고 걔가 널 못 믿으면 그건 걔 문제지 니 문제가 아니라고!!"(나: 그러니까 내가 미치는 거지! 한국 기준으로 보면 정반대야, 내가 남자 친구 뭘 하든 내버려 두는 히피 여친인 거지. 약간 우리 관계에 뭔 일 생겨도 네가 자유롭게 지내도록 그냥 믿고 내버려 둔 내 잘못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아.) 그러니까... 막 날뛰지 않고 엄청 참아줘서 고마워 자기야.
마지막으로 다니엘은 이렇게 물었다.
"어..? 근데 너 내 절친 마티유랑 얘기할 때 나한테 항상 얘기해준 건 아니잖아. 그랬었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아멜리 집 숙박 문제로 싸운 거 기억나? 니가 별로 관심 안 쏟는 규칙을 나 혼자 지켜봐야 의미 없으니까 그냥 어느 순간부터 말 안 했어."
그러니까 커플 사이의 문제가 '상식 선' 안에서 발생했다는 전제하에 말하자면... (우리 경우에는 이 '상식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부터 달랐지만) 프랑스 문화에서는 '질투한 놈 잘못'이고 한국 문화에서는 '질투하게 만든, 똑바로 처신 안 한 놈 잘못'이니 우리가 이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리 대화를 해 봐야 결론이 날 리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겪은 것 중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매듭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