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어

두 기념일 미니멀리스트의 만남

by 체리

비록 내가 학창 시절에 이성 교제는 못 해보았지만 주변 친구들을 통한 간접 경험은 한국의 연애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진득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념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 다가올 때까지 사귈 수 있었던 사람은 다니엘뿐이었고, 그동안 쌓인 연애에 관한 간접 지식들은 요망하게 나의 기대치를 올려놓았다.

제목에서 쓴 것처럼 우리 커플은 기념일을 많이 챙기지는 않는다. 다른 커플들은 어떤지 궁금하니 시간이 나신다면 한번 말씀해 주시길. 초기에는 나도 이런 것이 약간(진짜로 약간) 불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나의 정체성이 돌아왔기 때문에 크게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기념일을 아예 안 챙기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들만 완벽하게 챙겨도 조금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챙기는 기념일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처음 만난 날 (사귀지 않았을 때 - 그냥 축하한다는 말만 하고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평소보다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만 흐른다. )
2. 처음 키스한 날 (우리는 이 날을 처음 사귄 날 정도의 중요도로 다루고 있다, 친구인 척하다가 검은 속을 드러낸 날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3. 내 생일
4. 다니엘 생일
5. 크리스마스 (이건 우리의 기념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선물을 준비하는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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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기념일에 한해서만은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고 있다. 심지어 밸런타인데이에도 뭔가 큰 선물은 하지 않는데 이런 연인의 이벤트에 관심이 없는 다니엘이 하루는 퇴근길에 린츠 초콜릿(슈퍼마켓 초콜릿 정도의 위치)을 사 오면서 "미안해 자기야, 우린 가난한 커플이라 돈을 아껴야 해."라고 했다. 나는 초콜릿도 못 얻어먹고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린츠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 해도 꽤 좋았다. 게다가 내 나라에서 밸런타인데이는 '남자가 초콜릿 먹는 날'이었기 때문에-프랑스에는 화이트데이가 없다- 초콜릿을 먹는 게 나라는 사실도 좋았다. 우리는 미친 생활비의 도시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다니엘에게는 학자금 대출이 있었으며 나는 갓 취업한(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생활비가 거의 바닥난) 외국인이었다. 다니엘 말처럼 우리가 기념일을 소박하게 챙기는 건 아무래도 가난해서, 그리고 둘 다 사람들 틈에서 화려하게 이벤트를 즐기느니 잠옷을 입고 바닥을 굴러다니며 먼지를 쓰는 것을 것을 훨씬 선호하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내 생일과 다니엘 생일이 고작 1주일 반밖에 차이 나지 않고, 다니엘 생일에서 또 크리스마스까지 3주 정도밖에 시간이 없어서 적지 않은 돈이 연말에 펑펑 나가는 구조인지라 기념일을 챙길 때도 여윳돈의 분배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부터는 원천징수로 바뀌지만 프랑스의 연말에는 지난해의 소득에 대한 세금과 주거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정말로, 안 그래도 부유하진 않은 우리가 덮어놓고 쓰다 보면 후회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시기다!)

9-2.jpg 검은 고양이는 가끔 우리와 시간을 보낸다. 다니엘 동생의 고양이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귀기 시작한 초기에 나는 다니엘이 기념일-난 적어도 100일은 챙길 줄 알았거든!-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약간 슬프다고 생각했지만 1년을 사귀고 나니 기념일에 관심이 크지 않은 남자 친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도 인간관계일진대 어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없겠는가! 1년을 사귄 후에 밝혀진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우리 둘 다 날짜를 기억하는 데 별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2년 차 첫 뽀뽀 기념일은 둘 다 새까맣게 잊어버렸으니까. 어디 이뿐일까, 다니엘은 '무조건 선물!' 문화에서 자란데 반해 나는 ''성의는 돈으로 증명한다' 문화에서 자랐다. 아니, 문화라기 보다는 가풍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시험을 잘 보거나 생일이 다가오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묻거나 돈으로 주셨기 때문에 나 역시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상대가 갖고 싶은 것을 직접 묻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그런데 다니엘의 부모님은 (심지어 본인이 원치 않아도) 무조건! 사전 교섭 없이 부모님이 고른 선물을 주셨다. 두 분은 다니엘이 어릴 때부터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민한다는 건 그 사람을 소중히 한다는 뜻이란다'라고 하셨단다. 그런 탓에 나는 다니엘에게 상품권이나 돈이나, 심지어는 원하는 걸 물어보는 방법으로 기념일을 넘길 수 없게 되었지만 다니엘을 만난 후 처음으로 서프라이즈! 선물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지금까지는 즐거운 기념일을 보내고 있다. 그나저나 다니엘의 이번 생일에는 뭘 주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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