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약속

박치기랑 박치기 중에 선택해라

by 체리

그날 나는 머리를 말고 있었다. 이틀 만에 샤워를 했었다(계속 집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겠다). 곧 화장을 해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혹시 다니엘이 연락을 할지 몰라 노트북은 켜 두었다. 그리고 메신저 알림음이 들렸을 때, 나는 다니엘이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설마,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다른 친구를 만나야겠으니까 우리 그 전시회는 다음에 보러 가자는 말일 줄은. 하하 다시 생각해도 정말 미쳤군! 다니엘은 아직 두 번째 석사를 마치고 또 다른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중이었다. 그 전시회를 보자고 맨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다니엘이었고! 나는 원래 다니엘이 수업을 들으러 간 사이에 혼자 전시회를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다니엘이 같이 보자기에 안 가고 미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아니 그걸? 아니 한 시간 전에? 화낼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얼마나 화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날 아침 "그럼 이따 봐 자기야!"라고 상큼하게 말을 하고 나간 것도 다니엘이다. 나는 프랑스로 간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진지하게 '혹시 내가 미친놈을 고른 건 아닐지..'라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이것이 우리의 첫 싸움이었다. 내 제일 친한 친구가 이런 짓을 해도 길길이 날뛸 판에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 친구가 이런 도발 위협을 하다니. 나는 무척 화가 나서 혼자 전시회를 보러 갔다. 그런데 그렇게 화난 채로 보러 간 전시회가 뭐 재미있었겠는가, 고대하던 첫 전시회가 그따위로 끝나서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13-1.jpg 정의의 고데기 맛 좀 봐라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가 조별 과제 무임승차자야 뭐야. 이 싸움의 결론은 '문화 차이인가... 그냥 그런 걸로 하자 피곤하니까'로 났다. 사실 파리에 간 후 이런 식으로 마지막 순간에 약속 취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긴 했는데 약속 똑바로 지키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완전히 문화 차이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고, 그간 지켜보면서 문화 차이가 40, 다니엘과 다니엘 친구들의 이해할 수 없는 관행 60 정도로 잠정적 결론을 낸 상태이지만 이 문제는 내가 프랑스를 더 잘 알게 되면 판단해 보려 한다. 확실한 건 이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나는 처음부터 이따위 시간 약속 개념은 개도 안 물어갈 거라는 견해를 확실히 했다. 지금이야 다니엘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걸 알고-악의도 없고 생각도 없었겠지!- 다니엘이 내 문화를 이해하다 보니 서로 합의점을 찾았지만 그냥 썸 타는 사이에 이랬으면 더 볼 것도 없이 차단했을 거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화가 없다.


13-2.jpg 자기 너 미쵸소?


이 문제로도 많이 싸웠다. 다니엘도 다니엘이지만 다니엘 친구들이랑 약속할 때도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친놈들인가? 마지막 순간에 취소할 거면 주변 사람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혼자 집에 처박혀 살아야지'를 최대한 점잖고 긴 말로 포장해야 했고, 다니엘은 다니엘대로 자기 친구들이 나를 많이 배려하고 좋아하는데 조금은 내가 양보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서운해했다. 아무튼 그 전시회 사건에서 내가 화난 포인트는 꽤 많았는데,


1. 사과랍시고 한 게 Sorry 임
2. 메시지가 '미안 자기야, 마티유가 만나쟤서 마티유 집에 가는 길이야(통보), 전시회 나중에 보러 가자' 였음
3. 저따위 말을 해놓고 연락이 재깍재깍 안 됨-파리 지하철에서는 핸드폰이 잘 안 터짐-
4. 원래대로면 나 혼자 즐겁게 보고 왔을 전시회 자기가 같이 가자 그래서 연기했더니 1시간 전에 취소해서 내 기분뿐 아니라 전시회 경험까지 전부 망침
5. 심지어 집에 온 후에는 '왜 혼자 봤어.. 전시회 같이 가자니까'라고 서운해함 와우!
기억 상으로는 한두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글 쓰는 시점 기준으로 1년 반 정도 된 일이라 100%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니엘은 위와 같은 내 항의에 뭐라 변명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 말이 안 되는 것이었고, 지금이야 우리가 백여 번의 말싸움을 거치면서 단련되었지만 당시 나는 아직 영어 전투력이 충분히 차오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느끼는 답답함이 추가되면서 혈압이 쭉쭉 올랐다.


13-3.jpg

이건 지금 돌이켜 봐도 이해가 안 된다. 더 정확히는 이해할 마음이 없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냥 저런 일이 있었지만 잘 사귀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쟤를 참 많이 사랑하긴 하나보다 한다. 아래는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말이다.

- 저도 아직 프랑스 잘 모릅니다 하지만 프랑스에 시간 약속 잘 지키는 사람 많습니다.
- 듣기로는 파리 젊은 애들이 이런 식으로 나이롱 약속을 잡는다는데-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고- 이건 제가 존중할 수 없는 문화 차이였습니다.
- 지방마다 시간 약속 개념도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큰 나라이기도하고.
- 저는 친구들이 매 약속마다 무조건 30분~2시간 넘게 늦어서 3년 만에 만나는 건데 그냥 안 나가버린 적이 있습니다. 시간 약속에 꽤 엄격한 축이죠.
- 처음엔 저런 일 당하면 하루 꼬박 열을 펄펄 내면서 노발대발했는데 이젠 성격이 많이 완만해졌고 시간약속 관한 문화 차이도 어느정도 알게 되면서 그러려니 합니다. 그래도 남자친구라는 놈이 그러면 안되지..(그라데이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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