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잘했네 vs 내가 잘했네
우리는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귀기로 마음을 먹었고, 또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도 않아 같이 살아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평생 누군가와 함께하는 장밋빛 행복에 쓴웃음을 던져 온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우리가 미친 듯이 싸웠던 작년은 그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인해 찾아온 반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짜 많은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다니엘은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그런 싸움의 나날을 두 번은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지만-.
진짜 잘해보고 싶었던 연애에 실패하고 돈이나 많이 벌어서 돈 많은 할머니가 되자는 꿈을 가졌을 때쯤 다니엘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역시 나름대로 이상형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너무 도둑놈처럼 보일까 봐 차마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한 한 가지 로망이 있었으니, 연애를 하면 꼭 기복 없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거였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연애관에도 투영된 것이다. 내가 '진짜 잘해보고' 싶었던 상대도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땐 내가 상대보다 상당히 어렸기 때문에, 지금 돌이켜보면 상대가 기복이 없는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차마 내게 진짜 자신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 옛날 얘기지만. 마냥 응석만 부리고 싶다는 뜻은 아닌데 자주 응석 부릴 수 있는 상대와 사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니엘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내가 이 남자와 살면서-일단 사귈 거라는 사실 자체를 상상 못 했고- 참을 인을 매우 자주 쓰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 다만 다니엘은 귀여운 사람이었고, 당시에 다니엘은 아주 예의 바르고 뭘 해도 내게 양보하려 했기 때문에 '어쩌면 얘가 내가 찾던 기복 없는 그이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크나큰 오해였고... 사막 여우인 줄 알고 사온 동물이 사실은 포메라니안인 격이었지만 까짓것 여우면 어떻고 개면 어떻냐 건강하게만 있어다오! 이미 빠진 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다.
다니엘 이 녀석은 생각보다 까칠했고 장난기도 있었으며 우울해할 줄도 알았고 하여튼 솔직했다. 이 양반이 이번 주 들어 유난히 까칠하다 싶으면 주말 아침에 내가 좋아하는 베이커리까지 걸어가서 내가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케이크를 사 오거나 내 공책을-자기 공책을 찢지 왜 하필 내 걸- 찢어서 하트를 그린 다음에 탁자 위에 놓거나. 동갑내기 남자라는 미지의 생물과 살아가는 일은 하루하루 새로웠다. 그 미지의 생물은 찰지게 투덜거릴 줄 알았으며 파리에서 생활하며 갈고닦은 까칠함은 어디 내놔도 별로 뒤지지 않았다. 그 까칠함에서 나만은 예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가장 가까이에 살면서 그게 쉽게 되던가. 가끔 그 까칠함은 나를 상처 입혔다.
자존심이 상해서, 게다가 내 약한 부분을 굳이 드러내 놓고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입 다물고 있었지만 난 남성이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약간 겁이 난다. 그래서 가끔은 깊게 울리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커질 때 두려움을 느꼈다. 다니엘은 안 그래도 평균보다 목소리가 큰데 언쟁을 벌이면서 언성이 높아질 때 나는 점점 겁이 나는 걸 느꼈다. 거기에 프랑스식 제스처는 또 어떤지. 내 딴엔 참다 참다 하나를 말한 건데 다니엘이 눈알을 굴리고 기막히다는 듯이 손을 휘젓고 조금만 차갑게 말해도 날 겁먹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내가 남성의 큰 목소리를 무서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힘들게 꺼낸 말에 눈알을 굴리고 이런저런 손짓을 하는 것을 보면 그것들이 거절의 제스처처럼 느껴져서 또 싫었다. 그걸 거절로 받아들이는 내가 자존감 낮은 어린애 같아서 또 짜증이 팍 났고. 문화의 차이라고 손으로 쓰는 건 1분도 안 걸리지만, 이것이 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무겁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아주 오래 걸렸다.
지금이야 나름대로 타협점을 찾아서 잘해나가고 있지만 위에 나열한 제스처들은 다니엘 입장에선 딱히 거절의 표시도, 분노의 표현도 아니었다. 우리 둘 다 제 문화권에서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일들을 서로의 행복을 위해 고쳐나가야 하는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맞춰나가는 과정이 아주 고단했다. 나는 '네가 하는 행동들은 가끔 나를 무섭게 한단 말이야!'라고 했고, 다니엘은 '나도 조심하고 있단 말이야! 눈짓 하나, 말투 하나, 목소리까지 늘 하던 대로 안 하고 매번 신경 쓰는 거 쉬운 일 아니라고!!'라고 했다.
매주 말하고 있듯이 정말 힘들긴 했는데 생각해 보면 나는 양가 집안에서도 막내 격이고, 친한 친구들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게다가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관계에서도 상대가 '감정 기복 없는, 상냥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이면에 내게 보여주지 않은 진짜 그 사람이 더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을 공부하고 나서는 한 인간을 오롯이 알아나가는 게 여러모로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가치관 중 일부가 변할 만큼 큰 경험이었고, 내 생각과는 달리 나는 상대가 마냥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었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생각해 보면 10년 넘게 회피하던 애정관계 문제를 1년 동안 벼락치기했는데 편히 될 거라 생각한 게 내 욕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