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RGRG?
해야 하는 일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를 바라보는 상황을 싫어한다. 이것은 타고났다기보다는 후천적으로 습득한 경향이다. 내 기억 속 어머니는 앉거나 누워서 쉬는 법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비행 일정이 있으면 6개월 전부터 티켓을 찾아 비교적 저렴하게 예약해놓는 편이고, 당장 피곤해서 눕고 싶어도 안 한 일이 눈에 들어오면 별로 쉬는 것 같지 않다. 해야 하는 일의 얼룩은 창문의 세제 자국만큼이나 신경 쓰이는 존재이며, 특히 프랑스처럼 이번 주에 하지 않은 일을 만회할 기회가 하루, 이틀 후가 아닌 일주일 후에나 돌아올 가능성이 큰 나라에서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의 내 모습은 절에 가면 있는 인왕상 같기 때문에 사귄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니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우리의 '빨리빨리' 기준은 무척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꾸준히 기울일 필요가 있다.
늘 이렇게 빨리 진행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2016년 워킹 홀리데이 서류를 준비할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건강 관련 서류를 미리 받아두었기 때문에 더 빠른 진행이 가능했다-. 반차를 내면서 하루 반 만에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대사관을 방문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하니까. 공기관에서 서류나 인지를 받기 위해 반나절을 꼬박 들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내가 하루 반 만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발급받아 보냈다고 하자 다니엘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라고 되물었는데, 나는 다니엘이 과장을 하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반응이었고.... 우리의 다름에 토대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서류 하나 때문에 너무 오래 기다려요, 이 사무실에서 5시간이나 기다렸어요."라고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쌍해라.. 가서 뭐라도 마셔요"라고 하겠지만 프랑스에서는 "아 그래요?(좀 유난이군..)" 정도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빨리빨리가 무조건 좋지는 않다. 그 효율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딛고 선 것이라면 자랑스러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자 수속 하나 하려고, 반차도 아닌 월차를 하나 써야 하는 건 해도 너무한다. 이렇게 다른 문화이다 보니 프랑스에서 살 때 급해 죽을 지경인데, (한국) 은행 사람들이 4일째 답을 주지 않을 때. 그래서 미량의 분노를 담은 메일을 한 통 더 쓰려할 때. 다니엘의 지지를 얻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는 늘 "자기야, 4일은 평범하게 걸리는 시간이야. 그 사람들한테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 웃기시네 4일이 평범하다니 평범한 건 네 코딱지겠지 고 평범 유어 코딱지. 정말 짜증 나지만 다니엘은 몇 년 전에 자취를 감춘 나의 이성 같은 존재여서, 가끔 내 이마 근처에 깃털을 흩날리며 훈계를 하는 천사처럼 굴기도 한다. 더 짜증 나는 것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짜증 나는 게 뭐냐면 결국 그 말을 듣는 게 민주 사회의 시민에 더 어울리는 품격을 준다는 것이다. 아 짜증 나.
우리가 의견 차이를 보이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이 '속도'에 관한 견해 차이는 내 짜증에 가장 손쉽게 불을 댕긴다. 3만 원짜리 왕복 항공권을 발견했는데 다니엘이 여권 번호를 빨리 알려주지 않을 때, 다니엘이 토요일에 해야 할 일-주로 우체국, 은행 관련 일-을 하지 않아 다음 주말까지(주중엔 회사에 가야 하니까) 기다려야 할 때. 나는 '왜 빨리 안 하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다니엘은 '왜 빨리해야 하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다니엘은 "너무 실망하지 마, 다음 주에 하면 되잖아."라고 했다. 이 뻔뻔함은 매주 학습지를 책꽂이 밑에 숨긴 후 모른 척을 했던 7세 체리의 뻔뻔함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책꽂이 밑에 더 숨길 자리가 없어지고 난 후 발각되어 타작을 당했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에는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이 있다. 환경에 걸맞은 형질을 가진 종이 살아남는다는 것인데, 다니엘의 모습을 보며 그 생각을 했다. 프랑스 땅에도 분명히 빨리빨리 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프랑스 공기관과 금융권의 느리면 어쩔 건데 문화를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 중 몇몇은 화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속도에 적응한 이들이 살아남았으며 이 문화의 차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방향으로 사회가 성장한 건 아닐까.. 요는 다니엘이 나 같은 성격이었더라면 생활이 더 힘들었을 거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야기보다는 싸움과 눈치로 많이 좋아졌다. 다니엘은 이제 내가 싸우는 걸 좋아하거나 화가 많아서 모든 게 빨리 돌아가야만 만족하는 옹고집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는 이제 다니엘이 답답하게 느껴져도 화내기보다는 설명을 한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한 번 더 부탁한다.
하지만 우리의 다른 점들은 내게 다시 한번,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프랑스에서 무례한 짓을 할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섬뜩했다. 그래서 깃털을 날리는 이성 요정 다니엘의 충고는 짜증 나지만 내게 꼭 필요한 것이다. 고 평범 유어 코딱,, 아니 고마워 다니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