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워지지 않는 해외살이
2017년에 프랑스에 올 적에 현실적인 걱정을 해준 친구가 나에게도 있었다. 아직 사귀는 사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지도 않는, 같은 언어로 사고하지 못하는, 내가 사는 이 별의 규칙을 알지 못하는 남자와 살러 전 재산을 들고 프랑스에 가는 건 안전하지 못한 선택이라 해주었던 친구가 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비이성적 선택 앞에서 들뜬 친구에게 하기 힘든 말이었을 텐데도, 어차피 이런(?) 애들은 주위에서 뭐라 말한들 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세상의 법칙 앞에서 입을 여는 일이 꽤 피로한 일이었을 텐데도 이 일에 따르는 현실적인 위험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해줬던 소소가 문득 생각나는 겨울이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이곳에 와 여태 살고 있지만 가끔 소소를 생각하면 주변의 다른 친구들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나를 걱정해 주던 얼굴이 생각나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지금도 그때도 소소가 맞다. 다니엘이 미친 살인마였을 수도 있었고, 살인마는 아닐지라도 매 계절 다른 사랑을 소비하는 인스턴트형 인간이었을 수도 있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모험정신으로 손에 넣은 다니엘과의 삶은 벌써 6년 차에 접어들고 있고-그 시간 내내 같은 나라에서 지내지는 못했더라도- 초기에는 어느 나라에 정착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던 우리지만 점차 프랑스에 자리를 잡는 게 안정적이지 않겠냐는 결론에 다다랐다. 6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오물이 역류하던 원룸에 살던 우리 둘이 싸우고 나면 침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갈 수 있는-할 수 있다는 거지 하진 않습니다- 인간적인 아파트로 이사 왔다는 점, 아직 마지막 학위를 마치지 못해 수업을 듣고 인턴을 하던 다니엘이 이제 한 사람 몫을 하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점, 처음 만났을 땐 갓 어른이 되어 그래도 어린 테가 나던 우리 고양이가 이제 검은 코트에 한 가닥씩 은실을 비추기 시작했다는 점, 내가 계약직으로 충분하다 생각지 않고 더 오래 근무할 수 있는 직장 위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점도 말이다.
아무리 삶이 거센 파도치는 모래사장에서 처절하게 제 성 하나 올려보는 거라지만 어느 날 천지분간 못하고 날아온 이 별에서 '우리 성' 하나 짓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내가 알던 성 올리는 방법은 프랑스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가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상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일은 여전히 한 번씩 일어나는 사건이다.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머리통만 한 바위가 하나씩 날아와 성곽을 망가트리고, 그걸 고치는 일이 전보다 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망가진 부분을 손가락 빨며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프랑스 귀국 후 정신없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 엄마에게 주기 위해 샀던 에메랄드 불상의 모조품을 떨어트렸다. 플라스틱이라 깨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불상은 유감스럽게도 머리, 몸통, 어깨 장식의 세 조각으로 나뉘었고 이날은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사고로 인해 바로 입원했다는 것을-또 그것을 내게 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하필 이런 온 세상의 행운이 다 필요할 시기에 딸이란 놈이 하필 불상을 부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워서 흐느껴 울 준비를 완료한 채 풀썩 쪼그려앉았을 때 지금 내게 울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났다. 요리는 아직 끝내지도 못했고, 다니엘은 한 시간 반 정도 있으면 돌아올 테고. 체감상으로는 2초 만에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순간접착제를 집어 들었다. 무교인 나지만 제발 화내지 말아달라면서, 화를 내도 내게 내달라면서 제법 경건히, 족집게까지 동원해 가며 불상을 수리하던 머릿속에 서른 이후의 삶은 대체로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늘에 대고 나 보란 듯이 울 기력도 시간도 없어지는 것일까. 다행히 불상은 잘 수리했다.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 2002-세상에, 벌써 20년 전 영화다-)에서 모든 사람은 섬이라고 했다. 내 해외 생활이 4년에 접어든 만큼 특별나게 긴 기간은 아니지만 해가 지날수록, 또 운이 좋아 한국에 갈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점점 더, 내 삶이 하나의 섬으로 변해감을 느낀다. 친구들 삶의 중대사에 어떻게라도 얼굴이나마 볼 수 있으면 그건 대단히 운이 좋은 축에 속하고, 그들 삶에서 내가 점점 유리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이지만 그래도 다들 사회인인 만큼 내가 프랑스에 있던 한국에 있던 '1년에 한번 볼 수 있으면 그것도 이미 자주 보는 사이'라는 의견들이 많아서 소외감이 크거나 구체적이지 않다. 따라서 친구들과 떨어져 살아감에서 오는 쓸쓸함이 그래도 견뎌 낼만한 수준이라면 가족들과의 거리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매년이 다르게 죽순처럼 성장하는 어린이와 매년이 괄목한 만한 속도로 지나가는 노인들이 한 가족에 있어서인가, 5년도 아니고 1년 만에 보는 가족들인데도 매번이 다르다. 조카는 몰라보게 자라 있고, 부모님은 저번과 또 다르게 기력이 없거나 식사량이 팍 줄어 있거나 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의 나무꾼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보게 만든다. 동네에 새 가게가 들어왔다거나 재건축으로 풍경부터가 몰라보게 변했다거나 하는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말이다.
나만 섬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니엘과 함께 커플 단위일 때도 우리가 섬이라 느끼는 순간은 온다. 그건 프랑스에서는 보통이거나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이 용인하지만 한국에서는 이혼 사유까지도 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친구들에게 호소할 수 없다는 뜻이고, 반대의 경우도 분명히 발생한다. 공감이 주는 쾌감을 찾아 국제커플 커뮤니티를 찾아간다 하더라도 '국제커플', '한국-프랑스 커플'이라는 분류 안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장단점에 대해서 가볍게 수다를 떨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우리 커플이 겪는 갈등을 맥락, 문화, 정서, 관계 면에서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할 상대를 찾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학습해야 하고, 함께 하는 많은 순간이 자기 검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내가 품은 감정은 정당한가?'와 '아니 그래도 어떻게 저래'의 영원한 반복이다.
이곳 프랑스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파트너와 성공적인 관계를 맺은 후에도 어느 날 훌훌 털고 돌아간다는 선택을 하는 분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돌아가시는구나' 이상의 감흥이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분은 섬으로 부유하는 시간에 지쳤던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문득 신물 나고 지긋지긋하더라도 육지에 몸을 딱 붙이고 살던 그 시간이 그리워지셨을까. 짐작만 해보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섬이다. 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섬과 만났다는 것은 꽤 엄청난 일임이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 국제결혼에 준비가 되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내가 근해의 섬이 아닌 먼바다의 섬이 되었을 때 찾아올 풍랑들을 상상하고 대비하는 데에서 시작해 봐도 좋지 않을까. 물론 올 것을 알고 맞는 풍랑이라 해서 안 아픈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이겨내진다.
삶이 꼭 단단해지는 여행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엔 굳이 강해지고 단단해질 필요가 없다면 그만한 것도 없다. 하지만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삶도 썩 나쁘지 않다. 기특함이 삶에 주는 효능감을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4년 차의 삶에 나는 제법 기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