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에서 살아남는 일
드디어 취업을 했다. 재미있게도 하필 다니엘이 "올해 취업 활동 결과가 안 좋으면 내년에는 석사를 하나 더 하든지 하자"라는 말을 한 저녁이 지나간 바로 다음날 합격 소식을 들었다. 심신이 지쳐 있던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부엌을 청소하는 중이었다-라고 말하면 되게 자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침 부엌이 더러웠을 뿐이고 청소는 자주 하지 않는다-. 나는 기존 전공으로나 다른 전공으로나 학업을 다시 한다는 전개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또 연이은 탈락 소식, 그리고 지원 절차를 진행하던 회사가 아무 말 없이 연락을 끊는 일에 상당히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특히 매번 지원서를 넣을 때마다 '올해 7월에 결혼을 하느라 한국에 가야 하는데 이 점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지' 공손하게 물으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면 무척 행복하다. 또 매일 아침 한두 시간은 그냥 날아가는 광범위한 구인 공고 탐색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기분 좋은 부분 중 하나다.
직업을 구하면서 내가 바라는 부분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직업을 구하는 것은 집을 구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어 누구나 자신만의 조건이 있지만 앞으로 찾을 기회가 그 조건들을 모두 만족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몇 년 전의 아파트 사냥을 떠올리게 했다. 언제 이 땅에서의 취업 활동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냐마는 이번 취업 활동은 내게 있어 의미가 컸다. 내 이력서가 뒤죽박죽이고 단기간의 경험들만으로 채워져(최대 10개월) 있는 데다 어느 해는 한국, 또 어느 해는 프랑스에서 일했다고 적혀있다 보니 지금까지는 비자 갱신 때문에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야 했다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결혼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비자 문제는 완전히 해결이 된 지금, 게다가 마지막 업무 경험으로부터 상당히 시간이 지난 지금!! 또 서른이 넘은 지금!! 이제는 장기 근무 경험이 나타나 줘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특히 내가 프랑스에서 급여 노동자로 우뚝 서고 싶다면 더더욱 말이다.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프랑스에서 보낼 거라는 사실이 뚜렷해지면서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 또한 명확해졌다. 무엇보다 먼저 프랑스어 실력이 그랬고, 다음으로는 주거 안정성, 즉 우리 앞으로 된 집과 나를 '우리' 집으로 인도할 직업이 필요했다. 지금 나의 이력서 내실을 고려했을 때 결혼을 한 지금 아직 아이를 낳을지 어떨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이를 낳기 전까지 적어도 2년은 근무 경험이 있어야 수월하게 직업 시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섰다. 지금까지는 메뚜기처럼 6개월은 이곳에서, 다음 6개월은 저곳에서 근무해도 앞으로 살 곳이 명확하지 않으니 큰 불안감이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계속 살아갈 거라면 이곳 고용주들 눈에 그럴듯해 보일 만한 이력서를 꾸려야 했다. 앞으로 내가 직업 문제에 계속 발목을 잡힐지 어떨지는 올해 취업 활동에 달려있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특히 강하게 바란 것은 이력서 상에서만이라도 한국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회사에 취업하고 싶다는 점이었다.
올해 취업한 곳이 한국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서 1-2년을 근무한 후에 아이를 갖는다 가정했을 때 그 녀석을 어느 정도 키워놓은 후 직업 시장으로 돌아온다면. 그 뒤의 경력들은 자동적으로 한국 관련 기회에 한정될 거라는 생각이 컸다.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한국 기업에서 일한다면 익숙한 시스템 속에서 -어느 정도-아는 일을 한다는 장점은 있겠으나 그 장벽 안에서만 머물 거라면 나는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프랑스어를 공부했나?라는 생각도 들었고, 한국 기업을 선택했을 때 따라올 현실적인 어려움(현지 채용 인력과 주재원의 대우 차이, 현지 채용 한국인은 현지 채용 외국인이 퇴근한 후에도 당연하게 야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 업무에서 보여준 역량과 상관없이 주재원이나 본사 파견 인력과 마찰이라도 생긴다면 그들의 결정에 내 모든 것이 결정 난다는 불안함, 물리적인 거리 등)을 생각하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더 큰 직업 시장(한국어 실력이나 한국 업무 경력과 상관없는 프랑스 직업 시장)에 소구할 수 있는 경력을 쌓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방향으로 가야 10년 후든 5년 후든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더 매력적인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느꼈고 말이다. 운 좋게 프랑스에 온 후로는 불합리한 상황이나 정신적 폭력 앞에 내몰린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없는 만큼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앞으로 이직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무력하게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매력적인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내 이력서에 다음 경력이 어떻게 보일지도 당연히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덜 불안하고 싶었다. 다니엘이 얼마를 벌고 어떤 일을 하느냐에 상관없이 낮 동안 나만의 세계가 있고 내 동료들이 있고, 그 세상에 자부심을 갖고 살고 싶었다. 어느 날 모든 게 잘못되어 하루아침에 한국으로 가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해도 '뭐 어쩌겠나'라는 생각으로 짐을 싸는 담담함을 원했다. 우리가 쌓은 성에서 다니엘이라는 대들보를 들어내더라도 성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면 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말이다. 내가 자신에게 혹독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살면서'내가 프랑스 학위가 없어서 그래'나 '내 프랑스어가 충분하지 못해서야'라는 말이 무적의 방패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이야 프랑스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10년이 지나서도 저 말들에 기대고 안주할 수는 없다 생각했다. 물론 학위가 없는 게 사실이고 프랑스어는 내 모국어가 아니니 얼마나 잘 하더라도 부족함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만 저 말들을 부적처럼, 더 노력하지 않을 핑계로 사용하게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다. 뭘 까다롭게 고를 만큼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CDD(기간제 계약직)나 처음에는 CDD로 시작하더라도 CDI(정규직)로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원했고, 한국어를 제외한,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공고 위주로 살펴봤다. 이렇게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 뻔한 기회는 그나마 지난번 근무에서 벌어둔 돈이 있는 지금 같은 때가 아니면 도전하기 쉽지 않을 거라 느꼈기 때문에 초기에는 내 뚝심대로 밀고 갈 힘을 많이 얻었지만 그 단호함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안 좋은 소식들에 조금씩 꺾여 갔다. 어느 날은 이전에 했던 앙떼림(유급 휴가를 쓸 수 없다) 계약도 포함해서 찾아보고, 또 어느 날은 한국어로 일하는 직장에도 지원하기 시작하는 등 매일이 타협의 연속이었다.
목요일까지는 연락을 준다던 사람들이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거나, 네 레퍼런스들에게 연락을 해도 되겠냐는 말을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전 직장 상사분들께 부탁까지 드려 놓았는데 갑자기 탈락 메일을 받는 등 마음이 살살 깎여나가는 순간이야 많았지만-이때는 다시 연락드리면서 탈락했다고 말씀드릴 때가 제일 슬펐다- 무엇보다 힘든 건 내 이력서가 인기 있을 만한 공고에 지원했을 때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정말 될 것 같은 건 안 되고, 안 될 것 같아 보이던 기회가 최종까지 좋은 소식을 전해오는 등 이번 취업 활동은 매 순간이 예상을 빗나갔다. 6개월 동안 총 13 건의 면접을 봤고 이중 2차까지 올라간 건은 4건이었으며 결국 한 곳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다. 태국에서 돌아온 후로는 더욱 절박해졌기 때문에 굳이 조건을 따져 가며 지원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마지막 합격한 곳은 제법 좋은-나에게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1. 원하는 대로 프랑스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직장인 점, 드물게 한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
2. 한국 정부나 기업과 관계없는 회사라는 점
3. 설령 대규모 총파업으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1시간만 걸으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점-나는 아직 차도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는 것을 무서워한다-
4.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프랑스식 기본 복지를 제공하는 직장인 점
5. CDI 계약이라는 점
6. 승진은 못하더라도 동일 직종의 일자리가 파리에 드물지는 않다는 점
7. 주말에 쉴 수 있다는 점
8. 업무 시간이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지 않다는 점
일자리를 찾으면서 4번처럼 프랑스에서 많이 제공하는 복지가 제공되지 않는 일자리도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2017년 다니던 스타트업이 꽤 괜찮은 복지를 제공했다는 사실도 전보다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기본 복지라 함은 대단한 것은 아니고 점심 식대 지원(레스토랑 티켓)이나 의료보험 지원 등인데 복지 천국처럼 보이는 프랑스에서도 이런 것들을 제공하지 않는 회사가 가끔씩 있었다. 내 조건이 대단히 좋지도 않았던 만큼 '이걸 안 해주면 일 안 하겠다'라는 마인드로 구직을 하진 않았지만 최종 합격한 회사가 이것들을 제공한다는 건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6번 역시 지금까지 한 일들이 업무가 끝나면 회사가 영영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지금 하는 일이 끝나면 타사에서 같은 직종의 일을 구하기 힘들 만큼 특수 직종이라 만약에 회사가 망하면? 팀이 공중분해되면-특히 이 질문은 내가 2017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간 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팀이 산산이 흩어지거나 자진 퇴사를 종용 받는 상황을 생생히 전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끔 생각해 보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전혀 다른 직종에서 주니어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인데 프랑스 학위도, 순수 프랑스 경력도 없이 노리기에는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지금까지 한 일을 비슷하게나마 포장해서 들이밀어 볼 수 있는 서비스 직종에 계속해서 지원한 결과 다행히 이곳에서 이직하더라도 경력을 살린다는 선택지가 있는 직군에 합격할 수 있었다.
7,8번도 내 상황이 점점 나빠지면서 뭘 고르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스크리닝이나 1차 면접에서 시프트를 정해 일해야 할 수 있고 새벽, 주말, 심야 근무가 주기적으로 돌아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일단은 방긋 웃으며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다들 쉴 때 나도 쉬는 생활, 남들 나갈 때 나가서 돌아올 때 같이 돌아오는 생활이 어찌 매력적이지 않았겠냐마는 그것들은 일단 나중 문제였고 취직이 급했기 때문이다. 다만 서서 일하는 판매직이나 육체적으로 고된 부분이 있는 직업은 경험이 없다는 점은 둘째치고서라도 건강이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지 몰라 지원하면서도 걱정을 했다. 특히 프랑스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지금 나만 직업을 구하면 되는데 판매직을 구했다가 또 몸이 고장 나서 1년이고 6개월이고 쉰다면 아무리 이런 면에서는 인내심 깊은 다니엘이라도 지치지 않을까 싶어 정말 많은 만약을 상상했다. 그런 만큼 이번 일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근무 형태를 갖고 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었다. 다니엘은 늘 왜 그런 만약을 미리 생각해서 선택지를 줄이느냐고 잔소리를 하지만 아무리 내가 더 적극적으로 살기로 다짐했다고 한들 지속 불가능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에 달려드는 건 우둔함 이상의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서 아무리 충돌한들 타협할 마음이 없다. 결정이야 같이 내린다고 해도 그 결과의 영수증이 퇴직 후, 다음 직장으로의 이직 시 날아오는 순간 다니엘은 내 옆에 없으니 말이다. 또 그걸 탓할 수 없는 게 (아마도)어른의 삶이고.
정말 이도 저도 안 되어 피곤한 날에는 한국 채용 공고를 봤다. 그림이 좀 비참하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경력에 맞는 공고를 보면서 '나도 필요로 하는 곳들이 있어'라고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물론 이 방법은 부작용도 있었다. 부모님 집에서 가까운 데다 급여도 나쁘지 않은 공고를 발견하면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으니 말이다. 퇴근 후 마스크팩을 하면서 조카와 놀아주고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저녁거리 한두 가지를 요리해 두는 모습이 절로 상상됐으니까.
매번 휴재 후에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동안 써둔 소재 메모장을 본다. 취업 후기는 목록에 있었지만 그 소재를 쓰더라도 그럴 기회는 더 늦게 올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좋은 소식을 받을 수 있어 진심으로 기뻤다. 노력이라는 것이 늘 보답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작든 크든, 그동안 해온 일들이 보답받는 모든 순간이 못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