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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Feb 18. 2023

공기방울 밖의 삶

멈춰서는 안 되는 걸음


옛날부터 내 블로그를 찾아 주시던 분들도 가끔 착각하시는 부분인데 나와 다니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영어로 이야기했고 지금도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편하다. 한국어와 프랑스어가 선택지 중 하나로 들어왔다 해서 그것들이 원래 쓰던 영어만큼 편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내 프랑스어가 많이 늘었고 작년 내내 달프 시험 준비에 열을 올리면서, 또 같은 국제커플인 시누이 부부(프랑스-볼리비아) 집을 방문했을 당시 둘이 완전히 프랑스어로만 대화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집에서 프랑스어를  연습하는 것에 (나 말고 다니엘이)열을 올렸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그런 노력이 대단히 편하지는 않았다. 늘 불편했고 혀끝에 모래 주머니를 단 것만 같았다. 모든 게 한층 느려졌다. 맞는 표현을 찾아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세상이 달리의 그림처럼 천천히 녹아내리는 듯  했고, 시험에 쓰는 어휘는 일상 생활에 적합하지 않을 때도 왕왕 있었기 때문에 다니엘이 그런 부분을 매섭게 지적이라도 하면 의욕이 뚝 끊겼다. 나는 채찍질도 예쁘게 해줘야 하는 글러먹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지금도 작년 한 해를 그렇게 시험 공부에 중점을 둬야 했나 의구심이 있는 듯하지만 나는 달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지금도 작년 한해를 시험 준비에 쏟아부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회사를 다니면서 얻는 어휘나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어휘도 분명 공부를 해야겠지만 적어도 어려운 걸 먼저 해 두면 내가 앞으로 쭈욱 경제 활동 인구로서의 삶을 영위한다 해도 프랑스어에 내실이 부족하다느끼거나 보고서에 나오는 고급 어휘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에서 오는 비극은 그나마 덜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취업 소식이 들리기까지 다니엘은 가족간 대화 프랑스어 의무화 법안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가 거기에 불만을 갖거나 말거나 프랑스에서 취업을 꿈꾸는 한 그게 내게 필요한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 덕분에 일상생활에 쓰이는 프랑스어도 점점 늘다가 아예 프랑스어로만 말하는 직장에 몸담으면서 프랑스어는 단순한 선택지에서 생존 수단으로 바뀌었다. 새 직장은 누군가 느긋하게 뭔가를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 처절한 것은 매일 일이 끝나기 전에, 학급 종례처럼 내일부터 적용될 변경 사항을 말해주는데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으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누구도 아닌 나일 거라는 사실이다. 올해 초는 이렇게 언어개혁뿐 아니라 성격 개조까지 순조롭게 닻을 올렸다. 배달 전화도 못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도 몰라볼 만큼 외향적으로 변했지만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것을 물고 늘어지는 일에는 많이 약하니 말이다.


 프랑스어가 부족했을 때라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딴에는 기를 쓰고 영어로 말해준다는 사람들한테도 프랑스어로 말해 달라고 했던 그 시간동안마저 내가 투명한 영어 장벽, 영어 버블 속에서 생활해왔다는 것이 이제는 보인다. 다니엘의 가족들이 내 앞에서 안심하고 프랑스어만 사용하고, 다니엘 또한 '알아서 듣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기본이 된 지금 말이다. 스파이더맨의 벤 삼촌이 말했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저는 큰 프랑스어 실력을 가진 적이 없는데 어느새 -알아들을-책임만 이렇게 늘어났을까요 벤 삼촌.. 가끔 시무룩하게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모국어와 가까운 언어도 아니고 27살도 훌쩍 지나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이만큼 쌓아낸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만 아직도 피곤할 때, 아플 때, 몸은 말짱하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 프랑스어가 언어 아닌 백색소음 정도로 들리는  것은 속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스마트폰 앱들이 대기 상태에서도 메세지를 수신하는 것처럼 지금 구사할 수 있는 다른 언어들은 적극적으로 듣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정보의 형태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반면 프랑스어는 피곤하면 피곤할 수록 눈과 눈을 마주한 상태에서 온 감각을 동원해 받아들여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안락한 영어 버블, 공깃방울 밖의 삶을 택한 건 누구도 아닌 나이니 말이다. 안락한 방울 속에 머물수록 프랑스어가 멍한 상태에서도 정보로 들어오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테고. 내 손으로 영영 '야생의 프랑스'에서 유리되어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도 없는 것이고. 예민해질 때마다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나는 평생 외국인16432294번일 수밖에 없어'라고 자조하는 내가 영어 버블 속에 뿌리내리고 산다면 그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금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게 영어로 말해준 사람들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 말한다고 해서 그 따뜻한 마음에서 진정성이 조금 빠진다고 생각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매년 프랑스어 사용 비중이 점점 늘어나면서 나는 알아버린 것이다. 프랑스어 사용을 늘이면서 내가 생각하는 방식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도 조금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아직은 너무 미묘한 차이라서 형언하기 힘들지만 이 차이가 내게 좀더 날것의 세상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나는 눈치채고 말았다. 날것, 이 단어의 울림은 평소에 맘에 안들던 이들의 모순을 잘게 잘라 연구하고 곱씹은 뒤 꼬집고 조소하고 까발리기를 즐기는 나같은 사람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는 수밖에..못 알아들을 때마다 되묻는게 쪽팔리고 민망해도 알아들을 때까지 물어볼 수밖에. 지네 나라 태어나서 지네 나라 말 하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하나로 잘난척하는 게 더럽고 눈꼴시어도 물어볼 밖에 더 있나. 두드려서 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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