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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Mar 04. 2023

상놈이 될 수는 없어

매일의 균형잡기

 함께 하다 보면 좋은 점도, 싫은 점도 눈에 보이는 법이다. 내 경우는 다니엘이 내가 평생을 다른 나라에서 살다 온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화제에 대해 '너 그거 알잖아?'라고 당연하게 말할 때가 싫다. 당장 이곳에 온 지 몇 달도 안 됐을 때 동네 슈퍼마켓 어느 선반에 뭐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게 당연하다는 투로 '너 그거 알잖아?'라고 말할 때도 좋지는 않았지만 몇 년을 살았어도 대체 뭔 기준으로 정하는지 날이 갈수록 모르겠는 호칭 정리 감각에 대해 '너 그거 알잖아?'라고 물을 때는 정말 별로였다.

 프랑스어에는 Vous(경어체의 당신, 혹은 복수로 '너희들', '당신들')와 Tu(친근한 관계에서의 당신)가 있다. 프랑스에 갓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것들이 우리말의 존댓말(선생님)과 반말(너)로 100퍼센트 대치되는 개념이라 믿었는데 4년을 살면서 나의 이해는 '이것들은 존댓말과 반말로만 볼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들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데까지 왔다. 하지만 그뿐이다. 사실 살면 살수록 더 모르겠다.

작년까지 내가 배운 것들은 다음과 같다.
 - 어지간히 예의를 차리는 작위 있는 가정이 아닌 이상 할머니, 할아버지는 Tu라고 부르기
-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Tu라고 부르기
- 직장 상사는 웬만하면(스타트업 같은 분위기가 아닌 이상) Vous
- Tu라고 대뜸 부르지 말고 Tutoyer(Tu라고 부르는 행위)를 해도 되는지 동의를 구하고 말을 트는 것이 예의 바름
- 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Tu라고 부른다고 본인의 신념 주장하는 사람들 존재

그리고 올해 나는 아래와 같은 혼란을 겪었다
- 면접에서 깜빡이도 안 켜고 갑자기 Tu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만남
- 면접에서 Vous라고 하던 사람들이 합격하고 회사 가니까 Tutoyage(Tutoyer의 명사형) 동의를 따로 구하지 않고 바로 Tu라고 부르는 나의 직장
- 왜 너는 남 대하듯 서먹하게 Vous라고 하냐면서 서운한 듯 아닌듯한 말씀을 하는 시할아버님과 시할머님
- 아직도 이 규칙이 입에 익지 않아 시부모님께 뭐 좀 달라고 할 때 S'il vous plaît라고 했다가 Vous를 Te로 황급히 고쳐 말하는 나

 나는 작년 말까지만 해도 '공적일 땐 무조건 Vous, 사적인 상황은 웬만하면 Tu'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만큼 서른 넘은 면접자한테 대뜸 Tu라고 하는 게 한국에서 면접 볼 때 '그래서 너는 뭘 잘해?'라는 식으로 물은 것과 같은 느낌이라 불쾌했다. 마치 살인귀를 연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최민식 씨처럼 이 자식 왜 반말을 하고 난리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들으니 다니엘 회사에서 학생 인턴(Stage 혹은 Alternance)을 뽑을 때도 처음부터 Tu라고 부른다면서, 불쾌해할 영역의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학생도 아니고 스타쥬 자리도 아니었는걸..? 그래서 이 말은 아직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지금 다니는 직장은 스타트업도 아니고, 근무 시간 중에는 핸드폰 소지도 금하는 동시에 (면접 때는 아니었고 나중에야 갑자기 꺼낸 얘기지만) 비즈니스 복장을 입을 것을 권고하는 분위기인지라 당연히 여기에는 Vous 일 거라 굳게 믿었는데 갑자기 Tu가 나오니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국의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만큼, 또 지금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지금까지 가져온 버릇이 몇 년 만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어른들을 대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한국서 하던 대로 행동하고 있다. 뭔가를 건넬 때 두 손으로 받치거나, 날붙이는 내 쪽으로 향한 채 건네거나, (나보다) 어른이 술을 자작하면 병 바닥을 살짝 받치거나, 와인을 두 손으로 따르거나 하는 따위의 일들 말이다. 이것들은 몸에 밴 버릇이고 프랑스에서 이것들을 한다고 해서 대단한 오해를 사는 일은 없지만 한국에서 이것들을 안 하는 날에는 제법 상놈이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에서 몇 년을 산다고 한들 고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고로 내가 시부모님이나 다니엘 조부모님을 Vous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지난 몇 년은 시댁 어른들한테 실 부플레가 아닌 실 뜨플레 S'il te plaît라고  해야 한다고 지적을 듣고 고치는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달리 오해를 산다고 할만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다니엘의 외가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시아버지의 병 밑을 받쳤다가 마치 신입생 환영회 자리의 꼰대 선배 마냥 사랑하는 만큼 드시라고 술 강요하는 거냐는 웃음 섞인 이야기를 들었고, 다니엘의 외할아버지께서 Tu라고 부르라고 하시는 것을 듣고 조금 혼란스러웠다. 특히 연애 및 결혼 기간을 전부 합쳐도 뵌 적 없던, 며칠 전에 처음 뵌 다니엘 외삼촌에게 '이거 드실래요?'라고 여쭤볼 때 그분을 Tu라고 부르는 과정은 약간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나마 다니엘이 같이 있으니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거라고 설명을 해주어서 훨씬 나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마지막 날 상냥하게 작별 인사를 해주는 다니엘 사촌동생 세드릭이 '너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라고 말할 때 내가 '맞아 진짜야(나도 진짜로 좋았어)'라고 대답하는-여기서는 나도(Moi aussi)라고 대답해야지 나처럼 대답하면 '그래 이 개쩌는 나를 봤는데 당연히 좋았겠지'라는 느낌이 된다고- 작은 사고를 쳐서 아직도 자기 전에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다행히 외가 가족 모임은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시어머니가 '한국 사람들은 다 저렇게 예의를 차린다더라고.. 체리는 그냥 예의 바른 성격인 거야'라고 말씀하셨을 때나 시숙모가 내 이름을 매번 이상하게 발음할 때(셰리->셰웬 등등..)마다 저걸 고쳐드려봤자 두 시간쯤 후에는 다시 셰웬이 되어있을 텐데 고쳐드려야 하나 고민했을 때처럼-결국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직도 뭐가 이상적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게 더 나을지 잘 모르겠을 때는 많았지만 17명이라는 대인원이 함께 먹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거의 10년 만이어서 나름대로 즐거웠다. 또 볼리비아에서 온 시누이의 남편이 한국식 주도가 볼리비아식 주도랑 비슷한 면이 많다고 알려주어서 그 점도 흥미로웠다. 시아버지는 볼리비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서로 술을 따라주면 보통 그 자리에서 술 따르는 게 누구인지 어떤 규칙을 통해 정하냐면서, 또 홀수 인원이 술을 마시면 마지막 사람은 어떻게 하냐는 등의 질문을 하시면서 궁금해하셨다.

 다시 Vous와 Tu 사이의 혼란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새 직장에서 보낸 시간이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직장에서 대하는 민원인들이 가끔 내게 Tu라고 부르는 일도 없지 않은데 이 부분은-다시 볼 사람들이 아닌 만큼-굳이 뭐라 반응할 필요가 없지만 보통 이게 얼마 정도로 생각이 없는 행동 취급을 받는지, 상점에 들어가서 Bonjour라고 인사하지 않고 주문부터 해버리는 행동 비슷한 건지 아니면 그 정도까진 아닌지 가끔 궁금해진다. 매사 자신감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이방인이 몇 년의 경험으로 파악한 것들을 완전한 진리로 믿어버리면 그런 자신감 때문에 사고를 치는 수도 있어서 아직은 매일이 조심스럽다.

 길게 썼지만 결국 Vous 와 Tu는 단순히 존댓말/반말의 개념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는 Vous, 사생활에선 Tu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개념도 아닌 철저히 그 자리의 습도, 온도, 조명에 따라 정해지는 것인 듯 보이는 만큼 이제 겨우 초보 외국인 딱지를 졸업한 내게 당연히 알 거라는 투로 '너 그거 알잖아??'라며 어이없어하는 다니엘이 나는 더 더 더 어이없었다는 이야기다. 너는 꼭,, 너는 꼭 한국 와서 사는 날이 오면 그때 보자... 나는 비밀스럽게 벼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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