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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Jan 21. 2022

어떤 세상에 살고 싶습니까? : ⌜짐을 끄는 짐승들⌟

모든 몸은 비장애중심주의 억압 아래 있다


# 짐을 끄는 짐승들

# 수나우라 테일러

# 오월의봄

# 2020년 11월


# 한 줄 추천평 : ★★★★☆ 장애 해방과 동물 해방이라는 주제를 씨실과 날실로 엮는다. 사유의 확장을 경험하게 해 주며, 저자가 또 어떤 질문을 던져 줄지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 책. 


# 읽기 쉬는 정도 : ★★☆☆☆ 술술 읽히지 않는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려면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세 번째 읽을 때 가능했다. 


# 한 문단 요약 : 비장애중심주의, 종차별주의, 인간중심주의는 연결되어 있다. 한 가지 능력에 근거하여 우위를 나누는 가치관은 장애/비장애, 인간/동물로 이분법 했고, 이는 장애 차별과 육식을 정당화했다. 한 가지 기준으로 우열을 나누는 억압은 비단 장애인, 동물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된다. 우리가 가진 능력들은 서로 다르므로 서로 다른 속도와 방법으로 살고 있으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 이를 인식하고, 인정하자.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이 책은 그다지 친절한 책이 아니다. 비장애인이 살면서 장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장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내면화하여 진지하게 사유한 적이 있는가. 동물권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육식을 하고, 일상으로 여기며, 동물 학대를 욕하지만 동물권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주제인 장애 해방과 동물 해방이라는 각자 놓고 봐도 어려운 주제를 엮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내 생각이 뭐지?’ 하고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이어져 그냥 못 본 척하고 싶은 불편함까지 생길 지경이다(심지어 12장 마지막에선 언급된다. 행복한 무지 속에서 살아왔고,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이런 불편함은 새로이 깨닫게 되는 아이디어들로 흐려진다. 사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저자가 또 어떤 질문을 던질지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 책이다. 수나우라 테일러가 가이드가 되어 안내하는 긴 여정을 시작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모든 것은 비장애중심주의의 억압 아래 있다. 


저자는 비장애중심주의라는 프레임으로 동물과 장애를 살펴본다.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장애인들과 신체적, 정신적 결핍을 가진 인간과 뛰어난 인지 능력을 가진 동물을 비교하며 동물도 인간과 ‘비슷’하다라고 주장하는 동물권 옹호자들. 이 모든 것이 ‘비장애중심주의’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 불행한 외침이라고 천명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 책의 저자는 그냥 ‘동물이든’이라고 쓰기를 바라겠지만 이해를 위해 둘을 구분하였다) 모든 몸은 ‘비장애중심주의’의 억압 아래 있다. 


비장애중심주의는 비인간 동물과 장애인의 삶과 경험 모두를 덜 가치 있고 폐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며,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억압들로 이어진다. (p.122)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동물에게 적용한다.


장애학이라는 학문에서 장애를 다루는 여러 모델에 대해서 2장 장애란 무엇인가? 에서 간단하게 소개된다. 위험한 것, 더러운 것 또는 ‘동물’로 취급되어 강제 감금되거나 죽임을 당하던 옛 시절(혹은 지금까지도)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시각 역시 비장애중심주의) 용기와 의지로 해내는 감동 실화 서사 “슈퍼 불구 super crip (장애인이 하는 것이라면 엄청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감동을 불러일으킴을 가리키는 말)”. 그리고 장애의 적선의 모델도 있다. 장애인을 의존적이고 취약한 자들로 봄으로써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그리고 19~20세기 초 장애를 치료가 필요한 몸으로 바라보는 장애의 의료적 모델과 이에 대한 대항으로 나온 장애의 사회적 모델까지 말한다. 의료적 모델에서 장애를 병리가 있는 신체적, 정신적 기능 부전(functional failure)으로 보지만 사회적 모델은 의료적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를 구분한다. 손상이 장애가 되는 것은 특정한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므로 사회마다 장애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또 동일한 손상이라도 다른 장애로 분류될 수 있게 된다. 사회가 장애를 만들어 낸다라는 시각으로 장애를 바라보면 장애가 ‘장애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글자 크기가 엄청나게 줄어들어서 간판도, 표지판도 손톱만 한 크기의 글자로 바뀐다면 그 사회에서 그 정도로 두꺼운 렌즈를 장착한 안경을 낄 수 없다면 나의 시력이 장애가 되어 나는 장애인이 될 것이다. 병원에서 아무 문제없이 살던 사람들이 뇌졸중으로 신체 마비가 되어 한 순간에 장애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접하기 때문에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척에 두고 있다고 자위했는데, 이건 장애를 ‘손상(impairment)’과 구분하지 못한 짧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도 내가 비장애 신체와 장애 신체를 나도 모르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깨닫게 하는데, 사실 둘 사이의 구분은 명확하지도 않고, 영구적이지도 않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장애는 어떤 사람이 떠안는 정체성이기도 하고, 투쟁의 조건이기도 하고, 해방을 발견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데 활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동시에, 장애는 이 모든 것이기도 하다. (p. 59)


수나우라 테일러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서 견지하는 시각을 동물을 바라보는 데 적용한다.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든 인간과 동물의 구분 역시 마찬가지라고 역설한다. 동물(장애)을 열등한 피조물로 두고 그 보다 우위에 있으며 거리두기를 하고 싶어지는 욕구가 있고, 그들의 열등성을 강조하며 자신들은 인간임을 주장하는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또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인한 현실과 동물 멸시에 맞설 필요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 묻는 것,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p.65) 



동물은 과연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3장 ‘동물 불구들’ 에선 동물에게 장애가 어떤 개념인지에 대해 고찰한다. 인간은 비장애중심주의에서 파생된 사회화된 ‘장애’를 장애라고 한다는 것을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서 얘기했다. 이러한 ‘인간적인’ 장애 개념을 동물에게 투사하게 되는데, 장애가 인간 사회의 산물이라면 동물 사회에서는 장애를 인지하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동물들은 장애를 어떻게 ‘생각’할까? 


'말하는 침팬지' 4장에서 사람들이 우리에서 꺼내고 싶어 했던 것은 동물이 아니라 수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게 더 강하게 공감하는 반면, 그러한 특징을 결여한 장애인은 더 강하게 혐오한다. 또, 언어만이 가장 월등한 소통 수단이라는 가정(역시 비장애중심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으로 동물의 소통 체계를 폄하하고 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인간의 귀에 구분되지 않는다고 해서 ‘열등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동물의 입장에서 거꾸로 인간을 바라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저 인간 뭐라는 거야. 저렇게 이상한 주파수와 이상한 소리를 내지.”라며. 여기서는 ⌜숲은 고요하지 않다⌟에서 봤던 식물, 곤충들의 의사소통 방식들 역시 떠오르며 그들의 소통 체계를 ‘경이롭다’, ‘대단하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매우 인간 중심적인 시각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 그들도 우리만큼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종족 보존을 영위하며 거친 지구 환경 속에서 살아왔는데, 왜 그 정도의 서로 대화하는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걸까. 


'정상'에서 덜 떨어진 것이 장애로 상정된다면, 동물들 역시 장애의 한 범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계속 환기시킨다. 인간 개개인의 삶은 모두 다르다. 이 삶의 다양성의 영역을 장애인에게 까지로(이 말 역시 비장애중심주의 시각이지만), 그리고 동물에게 까지로 넓힐 수 있다. "장애운동가들은 장애인들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장애가 아우르는 체현 embodiment, 인지 cognition, 경험 experience의 다양성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다. 장애에는 결핍 lack과 무능 inabiity의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다르게 알고, 존재하고, 경험하는 방식들을 양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름 otherness에 대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런 가치 부여는 장애 문화를 동물 정의 justice관련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p.123)


그래서 "장애학과 장애운동은 삶의 가치를 논하는 데 특정한 신체적, 정신적 역량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장애 이론에 내재되어 있는 관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 존엄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지능, 이성, 민첩성, 신체적 자립, 이족보행 등과 같은 특정한 것들이 아니라는 거다. … 누구에게나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p.118)


동물권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장애중심주의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지적장애인, 유아, 혼수, 치매 노인 등을 끌어다 쓴다. 이들을 돌보기 때문에 동물도 돌봐야 한다는 주장이 동물 옹호가들이 동물권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 준다는 그 ‘이성’이 서양 철학에서 오랫동안 최고의 이데올로기였다. 이성은 정상 인간과 비정상 인간을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다. 이성의 상실은 곧 인격의 상실이고 ‘인간임’의 상실로 해석된다. 이렇듯 이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성이 없는 동물들은 죽여도 된다는 주장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이성’을 다루는 시각과 이성에 관한 정의를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적 능력에 기반한 지적 장애인에 관한 차별에 관해 얘기하며 동물을 구분할 때의 하나의 기준으로 ‘지적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즉, 개는 돼지보다 훨씬 지적이기 때문에 먹는 것을 주저하면서 돼지, 닭, 생선 등을 거침없이 먹는 것 자체가 어떤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인지 능력을 선택한 것이다. 나아가 ‘지적 능력’ 외에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능력들 공감 empathy, 도구 사용, 애도, 의사소통, 정서 등을 동물들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역시 인간을 척도로 동물을 평가하는 것뿐이겠지만 말이다. 한 마디로 소, 닭, 돼지 등이 ‘아픔을 느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 라는 주장의 허점을 지적한다. ‘인간과 유사한 특징을 가졌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 자체가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종차별주의에 기반한 생각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비장애중심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6장 동물이란 무엇인가? 에서는 서구 전통에서 인간(비장애인 헤테로 백인 남성)을 진화의 정점으로 두고, 다른 종보다 신에게 가깝다고 여기는 세계의 질서에 대해 설명한다. 9장 동물 모욕에서는 ‘동물 취급’ 받았던 장애인들의 경험과 현재도 ‘동물 취급’ 받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또 질문을 던진다. 어떤 사람은 정말 ‘동물’ 같다. 이 사람에게서 동물성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도리어 어떤 사람들은 동물성보다 ‘인간성’이라는 잣대가 더 필요할 수 있다고 질문을 꼰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과 동물성 모두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비인간 동물과 부정적인 방식으로 비교당한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우월성을 암시하거나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확고히 할 수 있을까?” (p.200)



'장애 = 낮은 삶의 질 = 불행 = 없애야만 되는 것'?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하지만 몇몇 동물은 더 평등하다)’라는 도전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는 12장에선 동물권 옹호자인 피터 싱어에 대해 비판한다. 지각력 sentience 가 번역된 쾌고감수능력에 초점을 맞춘 피터 싱어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동물과 장애를 바라본다. 피터 싱어는 인지 능력이 뛰어날수록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데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인지 능력이 뛰어난 존재를 죽이는 것이 인지 능력이 떨어진 존재를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쁘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결국 앞서 말한 서구 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이성’이라는 가치를 가장 최고로 두고 존재들의 우위를 나눈다. 앞에서 말한 이성이나, 쾌고감수능력 등 '인간 다운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동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종차별적, 인간우월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피터 싱어의 주장은 인지 능력이 떨어질 수 있는 장애인들은 삶을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피터 싱어가 장애를 의료적 모델에만 입각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나아가 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말은 제외되었으며 장애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피터 싱어와 만나서 나눈 대화들에선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긴다는 내용에서 ⌜사이보그가 되다⌟가 떠올랐다. “많은 장애인들이 불구로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는데, 어떤 것을 불구로 만든다는 것은 꼭 그것을 부순다는 뜻이 아니라, 장애의 역사, 정치, 자부심을 가지고 장애에 창조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며, 동시에 자립 independency, 정상 normalcy, 의료화 medicalization의 패러다임을 문제 삼는 행위이기도 하다.” 단돈 2달러 알약에 부작용 없이 장애가 치유될 수 있다면 먹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이 당연히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이보그가 되다>에서도 그렇고 수나우라 테일러 역시 거절했다. 


비건은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다


14장 고기의 낭만화, 15장 고기:자연재해 에서는 육식에 대해 고찰하며 비건은 단순히 식생활이나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수나우라 테일러가 말하는 비건은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메뉴 선택 및 제공에 의해서 불편함을 끼치는 정도를 넘어서서 종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를 거부하는 저항운동이자 가치관이다. 


정은혜 < 너는 늙어봤느냐 IV >


육식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근거가 있다. 첫째, 동물들이 행복하게 여생을 살면서, 전혀 고통 없이 죽어서 육고기가 되는 축산 시스템을 가지면 괜찮다 라는 시각이다. 둘째, 이 동물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종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 이익이라는 주장이다. 인간이 '먹어주지' 않았으면 일찌감치 멸종되었을 거라고 한다. 가축화된 동물들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의존적이었고, 힘들게 자연을 돌아다니며 먹고, 천적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인간의 우리 속에서 살기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하며 공생이자, 사회 계약이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이자 환경주의자 마티 킬 Martie Kheel의 주장을 요약하며 "환경주의자들은 종종 개체보다 전체, 즉 "생물 군집 biotic community"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며, 이것이 자연의 서로 다른 부분들에 크고 작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가치 위계를 만들어낸다. 종과 생태계에는 가치가 부여되지만 개체에게는 부여되지 않는다. 야생동물은 가축화된 동물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런 관점은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비가축화된 종들의 자율성과 자연 전체에 대한 공헌을 축복하는 동시에 개별 동물들, 특히 가축화된 동물들(흔히 이들은 의존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로 멸시받고, 때로는 더 큰 생물 군집에 해를 끼친다고 간주된다)의 복지에 치중하는 일이 순진하고 감상적임을 시사한다."(p.283) 개별 동물들은 평가절하되고, "생물 군집"이 숭배되는지 꼬집는다. 이는 장애인에게도 적용된 개념이며, 여성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이다. 



결론 1 : 결국은 연결되어있으니 서로를 비판하지 말고 시스템을 비판하자


책의 막바지로 다가갈 때 반복적으로 나오는 질문이 있다. "당신이 장애에 대해 그렇게 긍정한다면 왜 장애를 유발하는 부작용이 있는 약들을 사람들이 먹는 걸 막아야 하느냐?"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우리는 장애가 생기는 것을 환영하고 욕망할 수 있느냐?" "우리는 장애를 유발하는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장애인들이 스스로 힘을 북돋는 empower 방식으로 자기 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장애가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세상에 가져올 수 있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장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장애는 전쟁, 도살장, 농업, 산업 오염물, 화학물 중독, 사고, 병, 빈곤, 사회적 서비스의 부재 등 불의가 가져온 산물이다. 이런 세계에 대한 비판이 이 책을 관통하는 수나우라 테일러의 생각이다.



결론 2 : 우리는 모두 의존하는 존재이며 상호 의존하고 있다. 


Beasts of burden이라는 원제는 장애인 그리고 동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짐 burden이자 짐승 beast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장애인은 의존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정부의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안 된다. 그리고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가축화된 동물은 인간에게 의존하고, 야생 동물 역시 서식지 결정을 인간이 결정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과 동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의존적인 존재이다. 생의 주기에서 단 한 번도 타인의 도움 없이 자립적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을까. 수나우라 테일러는 의존의 부정적인 이미지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며, 일반적인 의존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 3 : 당신은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합니까?


수나우라 테일러의 최종적인 질문은 “당신은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합니까?"라고 보인다. 하나의 기준으로 우열이 나뉘는 세상을 원하냐 아니면 취약성, 가변성,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상을 원하냐


모든 ‘것’들, 모든 개체들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어찌 보면 뻔한 결론으로 끝나버린다. 하지만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기' 라던가 '집중해서 수업 듣고 공부하기' 라던가 하는 당연한 것이 행동하기 '쉬운'게 아님을 알고 있다. 결론이 조금은 힘 빠질 순 있어도, 이 결론까지 이르는 사유가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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