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과학의 진보로 인해 '교정' 및 '종식' 되어야 한다?
# 사이보그가 되다
# 김초엽, 김원영
# 사계절
# 2021년 1월
# 한 줄 추천평 : ★★★★☆ 우리는 '예비'장애인이다. 이를 쉽게 잊고 산다. 취약함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 읽기 쉬는 정도 : ★★★★☆ 두 명의 저자가 챕터를 나눠서 썼고, 마지막에는 저자의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렵게 쓰여 있지 않다.
시사인 x 읽는 당신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절대로 안 읽을 책을 읽게 해 준다는 점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으로서 책을 추천해주는 역할이지, 추천받아 읽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시사인이 나의 가치관에 정확하게 ‘핏’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가끔 시사인을 읽다 보면 피곤하다고 느낄 정도의 정서적 소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시사인을 정기 구독하고 시사인 x 읽는 당신 북클럽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간에 지날수록 고착화되는 브레인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새로운 자극의 책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함께!
제목만으로 장애에 관한 이야기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장애인과 사이보그라는 단어 사이에 느껴지는 간극이 크다. 사이보그란 단어의 명확한 의미를 찾아본 적조,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지만 그냥 왠지 <스타워즈>의 R2D2, 드로이드 , <인터스텔라>의 타스가 생각난다. 사이보그의 사전적 의미는 ‘생물 본래의 기관과 같은 기능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기계 장치를 생물에 이식한 결합체. 생물체가 일하기 어려운 환경에서의 활동을 위하여 연구하였는데, 전자 의족이나 인공 심장ㆍ인공 콩팥 따위의 의료 면에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내가 생각한 사이보그는 사전적 의미에서도 조금 떨어진 로봇에 가까운 듯하다. 그리고 모두 먼 미래의 존재들이다. 나에게 사이보그란 내 옆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미래의 언젠가 개발되어야 할 것(인간?)이라는 추상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난 한 번도 우리 오빠를 사이보그라고 인식한 적 없다. 그냥 장애인일 뿐.
「사이보그가 되다」는 내게 익숙한 내용이 많았다. 이유는 친오빠가 저자와 같은 신경성 청력 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많은 부분은 익히 목격했다. ‘일반적인’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빠가 겪었던 수많은 불편함들, 그리고 인공와우 이식을 하냐 마냐의 선택의 문제를 둘러싼 아빠와 오빠의 갈등 그리고 ‘정상인’의 기준에서 강요되어 가중되는 장애인의 장애 등등. 초인종과 알람 소리가 가장 안 들린다는 저자의 말에 초인종을 아무리 누르고, 현관문을 부서져라 두드려도 열지 않아 몇 시간을 문 밖에 기다렸던 정말이지 개빡쳤던 하지만 잊고 있었던 경험도 떠올랐다.
오빠가 보청기를 바꿀 때마다 따라가서 ‘통역사’ 노릇을 했지만 한 번도 오빠가 기계와 붙어있는 진일보한 미래 인류인 사이보그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냥 현관문 하나도 못 열어주는 짜증 나는 ‘장애인’이었을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처음 든 생각 ‘후천적 청력 장애인이라면 우리 오빠와 같은 상황인데, 이렇게 ‘정상적인’ 논의와 대화가 가능하다니?!’라는 점이었다. 대학교 중퇴 이후 칩거 생활을 약 20년째 하고 있는 오빠는 안 쓰는 능력이 퇴화하듯 사회성이 감소하였다.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나가기도 힘들다. 사람들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던 중학교 때의 사교력이 머물러있기 때문에 쓰는 언어나 어휘, 현실인식 등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점점 커가지만 오빠는 멈춰있다가 점점 어려져 간다.
이건 비단 오빠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와 고립된 장애인의 문제점인 듯하다(그래서 가장 먼저 저자들에 대한 부러움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렇게 교류하며 글도 쓰고 또 논리적인 생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너무나 사소한 일상도 어그러지는 장애인과 깊은 우정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인내’하며 교류할 사람은 별로 없다. 시혜의 위치에 있는 자원봉사자나 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의사라면 모를까.
가족이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와 가족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문제에 항상 봉착한다. 후자의 경우 가족이기 때문에 더 참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만약 내가 정신과 전문의고 오빠를 환자로 만났으면 차근차근 조곤조곤 얘기를 들어주고, 교정을 해나갈텐데 가족이기 때문에 감정이 우선된다.
아빠는 오빠를 많이 혼냈다. 말이 너무 빠르다, 말이 어눌하다,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한다, 다시 제대로 말해라 등등. 당연한 말이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생각은 강요된 폭력이다.
오빠가 어렸을 땐 인공와우 이식이 한국에선 없었던 모양이다. 중국으로 한방 치료를 하러 다녔다. 그러다 오빠가 20대가 되었을 때 아빠가 인공와우 이식을 하자고 했다. 병원도 갔었다. 그리나 오빠는 이식을 하지 않겠다고, 아빠는 하라고 싸웠다. 아빠는 오빠를 ‘정상인’으로 만들어 ‘정상인의 역할’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부모의 의무로 생각했다. 오빠의 이유는 너무 큰소리가 날 경우엔 보청기 음량을 줄이고 싶은데, 달팽이관을 이식하면 그러한 조절이 불가능한 게 싫다는 이유였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이유는 단지 그뿐만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각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오빠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데 중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끄러운 소리를 전원 차단을 내림으로써 세계와 쉽게 분리해낼 수 있고, 입모양을 읽으며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는 오빠였기 때문이다. 난 속으로 ‘입모양 안 보고 그냥 듣고 알아듣는데, 입모양으로 알아듣는다는 게 저렇게 자랑할 일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오빠의 아이덴티티에는 중요했던 것 같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에게 '정상성 규범'을 강요한다. 장애인의 신체는 재활되어야 하고, 치료되어야 하며, 교정되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네가 지금 안 들려서 모르지, 들리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이 말은 오빠가 아빠한테도 똑같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했던 것 같다.
'아빠가 지금 들려서 모르지, 안 들리면 알게 될 거야.'
"... 기존의 주류 장애 기술이 주로 비장애인 전문가들에 의해서, 장애인을 '위해'만들어진 기숙이었다고 지적한다.... 장애 기술이 장애 자체를 '혁신'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p.186~187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모를 때가 많다.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사람은 우주와 같다. 고민하고 파도 파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를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심지어 비장애인이라 장애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네가 지금 필요로 하는 건 이거야. 내가 볼 땐 넌 이게 있으면 돼.'
라고 거만하게 강제하고 있다.
마블의 윈터 솔저 버키도 강철 팔을 달고 있는 장애인이지만, 아무도 윈터 솔저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보다 진일보한 초인적인 존재로 여기며 그의 강철 팔이 멋지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족을 달고 걸어가는 장애인이 느리다고 짜증 내며, 방해한다고 극혐 한다. 윈터 솔저는 사이보그고, 장애인은 사이보그가 아니라는 말은 사이보그의 사전적 정의에 따라서는 틀린 명제이다. ‘장애인’이라는 언어와 ‘사이보그’라는 언어는 상호 치환 가능할 것인가.
취약함과 의존성이 과학 기술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사이보그’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전개함이 흥미롭다.
“어떤 테크놀로지와 만난 인간의 주체성은 이를 통해 기능적인 자유를 얼마나 획득하느냐가 아니라, 그 테크놀로지를 ‘지배할 자격’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 온몸으로 버텨내고 생존해야 한다. 그래야 그 무기(테크놀로지)를 소유할 ‘자격’을 인정받는다. … 영웅의 성장 서사는 장애와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고가의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장애인은 그 기술을 압도할 만한 스토리 혹은 테크 관련 작업이나 지적, 기술적 역량을 지녀야 ‘휴머니즘적 영웅’이 될 수 있다.” p. 100-101
그렇다면 모든 장애인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혜택을 입는 사람들일까? 오빠의 예를 봐서도 딱히 '무조건 적인 수혜를 받는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보청기는 가끔 찌르는 듯한 고음을 내며 고장이 나고, 인공 와우를 넣는다고 해서 청각 장애가 없는 사람이 듣는 것처럼 온전하게 들을 순 없다. 이 책에선 기술의 발전으로 '사이보그'가 된 장애인들이 인공물로 인한 고통과 염증 등의 '부작용'에 대해서 다양하게 언급한다. 즉, 장애인들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이 너희들의 불완전함을 없애줄 거야!"
라는 역시 비장애인이 할 만한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저자들은 튼튼한 뼈가 없고, 빠릿빠릿한 청신경이 없다. 나는 안경이나 렌즈가 없으면 -5.0의 시력으로 형체만 흐릿하게 보인다. 누구는 간암으로 간을 떼어냈다. 누구는 위암으로 위가 없고, 누구는 폐암으로 폐의 절반을 떼어냈고, 누구는 직장과 항문이 없어 장루를 달고 있다. 누구는 머리카락이 없고, 누구는 튼튼한 발바닥이 없다. 누구는 허리 디스크가 반쪽이고, 누구는 인대가 끊어지고 없다. 과연 결여된 것이 없는 궁극의 완전한 몸은 무엇일까? 영화 <가타카> , <아일랜드>, 멧 데이먼 <엘리시움> 도 생각난다.
영화에서 처럼 몸이 완벽해진다면 정신은 어떨까? 누구는 사근사근함이 없고, 누구는 자신감이 없다. 누구는 친절함이 없고, 누구는 용기가 없다. 누구는 참을성이 없고, 누구는 고분고분함이 없다. 무언가 ‘완벽’ 하지 못한 정신이다. 우리가 뇌까지 완벽하게 만든다면 정신도 완벽해질까?
‘장애의 종식’이 아니라 3장에서 언급된 용어 ‘신경 다양성’도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은 0과 1의 이진법으로 구분되어지는 게 아니라 그 사이 셀 수 없이 많은 무한소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흑과 백이 아니라 그 사이의 그러데이션이다. 그렇기에 8장의 틈새 메우기는 중요하다. 이것은 결국 시사인이 좋아하는 단어 ‘연대’와도 연결된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 역시 혼자서는 살 수 없다.
p.170의 저자의 장애에 대한 정의가 와닿는다.
"... 장애란 단지 신체의 기능적(도구적) 역할을 결여한 상태가 아니라, 그 몸을 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할 때 비로소 장애가 된다"
p.278 에도 결함 없는 완전한 과학 기술로 장애를 '종식'시킬 것을 최종 목표로 삼지 말고 다른 대안을 제안한다.
"능력 차별주의를 끝내는 것. 그것은 손상과 취약함, 의존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