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아먹는 산, 설악
어릴 적 아빠의 설악 기행이 어찌나 재밌게 들리던지.
78학번 아빠는 학교가 휴교될 때마다 설악을 다녀오곤 했다. (대학생들의 데모를 막기 위해 내려진 박정희 정권의 휴교령이다.) 20대 청춘, 친구들과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강원도 가는 길. 그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미 낭만이 넘실댄다. 소주병을 몇 십 개나 이고 지고 오르며 마신 얘기, 그 와중에 자기 배낭에 있는 소주병 먼저 비우려고 하는 얌생이들, 50분 오르고 10분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 당시엔 캠핑이 가능해서 텐트 치고 자는 이야기, 내설악에서 바라보는 외설악 풍경은
"이야~"
아빠는 아직도 이렇게 감탄한다.
내설악에서 출발하여 설악의 품에서 2박을 하고 동해 바다에 풍덩! 속초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왔다는 여행기는 파워 N의 상상력이 합쳐져 더욱 화려해졌다. 낭만 치사량이다 이건.
나에게 그렇게 설악은 환상의 동화세계가 되어서 자리하고 있었다. 30년이 지나 08학번이 된 나는 그런 모험을 할 수 없었다. 불과 2년 전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죽을 위기까지 갔다 왔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사고로 인해 손상된 장기를 복구하느라 허덕이고 있었고, 거친 운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저 '언젠간 가지 않을까?' 정도로만 막연하게 있던 설악을 처음 간 건 그로부터 한~참 지난 30대 중반이 된 2024년 6월이었다. 계기는 단순히 다가왔다. 나의 펜팔 친구 현미가 설악을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현미는 등산 경험이 두세 번뿐이었는데 1박 2일 설악 산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나도 설악은 가본 적이 없었다.
우리 둘 다 무사히 설악에서 빠져나와 서울로 오는 길에 현미에게 말했다.
"현미야. 다 끝나서 하는 말인데... 정말 등산 경험이 적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대범함이었어!"
"하지만 우리 둘 다 안 다치고 끝내서 참 다행이야!!"
나의 첫 설악 기행도 낭만이 넘쳤다.
설악산은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산이다. 설악산에서 일어나는 인명 사고만 검색해도 무서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사람이 죽는 사고 외에도 레인저들이 수도 없이 출동한다. 다치거나 길을 잃어서 구조되거나, 하산할 힘이 없어 구조 요청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설악산 사망 사고는 괴담으로 전해지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24년 10월엔 강풍에 나무가 쓰러져서 1명이 사망했고, 25년 1월엔 계곡 아래로 추락해 사망한 사고도 있고, 안타깝게도 구조 작업을 진행하던 구조대원이 사망하기도 했다.
처음 등산을 다니기 시작하였을 때 왜 사람들이 저렇게 큰 배낭을 메고 무겁고 힘들게 등산을 하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 많은 짐들은 전부 비상시를 대비한 것들이었다. 산은 고도가 높아지며 기온이 떨어진다. 바다 주변의 산들은 날씨가 더욱 빠르게 변한다. 설악산도 바다를 끼고 있고, 산세가 험하다. 고지대로 갈수록 날씨가 진! 짜! 변화무쌍하다. 그리고 산들이 겹겹이 있어 강풍이 불 경우 풍속이 어마어마하다. 세찬 바람이 불면 체감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그저 눈으로 보는 숫자와는 천지차이로 추워진다. 그리고 설악산엔 돌풍도 흔하다.
산은 알면 알수록 무섭다. 그리고 대체로 산을 얕본 사람들이 산에서 사고를 당한다. 아직 여름이 안 끝났으니까 얇은 재킷만 입는다거나, 가을이니까 패딩까진 필요 없겠지 라는 '일반적인' 계절이나 온도를 기준으로 준비를 하는 건 제대로 한 등산 짐싸기가 아니다.
나 역시 6월 한 여름에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와중에 설악을 갔지만 공룡 능선에서 부는 자연 에어컨 바람에 고어텍스 재킷을 꺼내 입어야만 했다. 잠시 앉아서 밥을 먹는 중에 흘린 땀이 강한 바람에 식어 갑자기 한기가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나의 배낭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한겨울 산행을 갈 땐 껴입을 수 있는 옷만 여벌로 3개를 더 챙겼다.
'2개만 챙길까? 3개는 진짜 오바다. 그래도 챙겨야지.'
하지만 '진짜 오바'가 아니었다. 결국 설악 계곡 한가운데에서 그 3개를 모두 껴입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만 멈추면 손, 발끝이 차가워졌다.
어린 시절 아빠에게 듣던 설악산 기행에서 설악은 마치 환상의 동화 세계 같았다. 아빠의 생생한 이야기에 내가 그린 설악은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내가 직접 겪은 설악은 포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웅장한 봉우리들에 제압당하는 느낌! 그런 설악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설악이 마치 사람을 잡아먹고, 그 정기로 인해 점점 아름다워지는 마계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거라고. 마계 설악은 눈도, 비도, 바람도, 구름도, 안개도 변화무쌍하며 한 걸음 차이로 풍경이 바뀐다. 겹겹이 위치한 기암절벽, 투명하다 못해 날카로운 물, 현실 같지 않은 압도감. 그리고 들어가긴 쉬우나 나오기는 어려운, 내 다리를 붙잡고 안 내보내주는 늪과 같은 느낌도.
그래서 설악산 산행을 시작할 때마다 다짐한다.
'오늘도 나의 목표는 아름다운 걸 잔뜩 보고 해지기 전에 다치지 않고 나와서 집에 가서 따숩게 자는 거야!'
무슨 일이 생겨도 마계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등산 시엔 나침반, 오프라인 등산 지도도 챙기는 게 좋다. 설악은 곳곳에서 통신이 두절된다. 그것이 등산로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온도가 너무 높거나 추울 시에 배터리 방전이 빨리 진행된다.
설악에서 멋진 풍경을 보면 아빠에게 사진을 보낸다.
"여기 어디게?"
아빠는 거의 전부 맞춘다. 이제는 노쇠하여 등산을 못 하는 아빠의 기억 속엔 멋진 설악이 있겠지. 그리고 나의 기억 에도 나만의 멋진 설악이 생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