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거의 구워 듣기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수들한테 미안함을 느껴.”

by 정여해

우리는 유년기를 아날로그로 시작했으나 청소년기에 갑자기 디지털 세상으로 막이 전환되었다. 집을 떠올려 보면, 내 방엔 유선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다이얼을 돌리는 건 아니지만 원형으로 숫자가 박힌 것으로 앤티크한 느낌이 좋아 내가 직접 고른 것이다. 거실엔 진공관이 매력적인 스피커가 있었다. LP 플레이어는 없었지만 꽤나 부피가 큰 전축이 있어 클래식 전집 CD를 듣곤 했다. 아침엔 종이 신문이 배달되었고, 간혹 새벽에 깨어있는 날이면 종이 신문이 날려 배달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복도 책장엔 육중한 두께를 자랑하는 백과사전 전집이 여러 종 있었다. 배경이 빨간 것은 그림이 많은 어린이 용이었고, 겉표지가 짙은 고동색을 띠는 것은 글씨만 빼곡한 어른 것으로 나는 거의 열어보지 않았다. 당시에 궁금한 게 생기면 찾아보는 것이 바로 이 백과사전이었고, 그림을 옮겨 그리는 게 싫어서 백과사전을 잘라 오려 붙여 버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파나마 운하'에 대해 숙제를 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뒤적이던 게 기억난다. 우리 때의 구글, 우리 때의 네이버, 우리 때의 챗지피티였다.


IMG_4706.JPG 숙제할 때 참고하던 백과사전




오프라인의 시작은 온라인으로부터


전통적인 소통 수단인 편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인터넷 덕분인 게 아이러니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에 있던 90년대의 특징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286, 386, 486, 펜티엄으로 PC 가 바뀌는 걸 보았고, ms-dos부터 윈도우로 운영 체제의 변화도 목격했다. 마우스도 볼마우스에서 광 마우스로, 무선 마우스로 바뀌어갔다. 아빠 손바닥 크기 만한 플로피 디스크는 내 손바닥 크기의 디스켓으로 바뀌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학교에 컴퓨터룸이 생기면서 컴퓨터 수업도 나타나 타자연습을 했다. e-mail 주소 만들기, 문서 작성하여 디스켓에 저장해서 제출하는 수업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에 누구는 손글씨로 숙제를 하고, 누구는 컴퓨터로 작성 후 프린트한 숙제를 제출했고, 머리가 좀 커 컨트롤 씨브이를 알게 된 이후엔 ‘무조건’ 손글씨로 숙제를 해오라는 선생님에게 반항심도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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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 윈도우 98 CD. 오 :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아빠가 처음으로 휴대폰을 쓰기 시작했을 때, 용건도 없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아빠 뭐해? 어디야? 아빠 지금 핸드폰이야? 내 말 잘 들려?"

위로 주욱 안테나를 뽑아야 하고, 푹신푹신한 숫자 패드가 형광빛을 내던 핸드폰으로 기억한다. 이후 아빠 핸드폰의 크기는 점점 작아졌다. 그러다가 엄마도 반으로 접히는 모토로라 핸드폰을 가지게 되었다. 세 줄 정도 글을 쓰면 꽉 차는 아주 작은 화면이었지만 까만 아빠의 핸드폰과 다르게 금색의 핸드폰이 참 예뻐 보였다. 나는 엄마 핸드폰으로 사촌 언니에게 문자를 보내며 놀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또래 친구들 한 두 명씩 핸드폰을 소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필수품이 되어 중3 땐 이미 핸드폰이 없는 친구들이 없었다. 2000년대 초반 핸드폰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는데, '컬러폰'의 등장 뿐만 아니라 16화음, 32화음, 64화음 벨소리가 진화하더니 급기야 카메라도 달렸다. 몇 년 후에 헵틱 터치폰이 나왔고, 아이폰이 2007년, 대학교 1학년 때 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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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 담배보다 작은 크기의 모토로라 핸드폰. 크기가 작아지는 게 대세였다. 오 : 애니콜 슬라이드 폰



카세트테이프와 CD, MP3 로의 변화 역시 우리 세대를 꿰뚫었다. 이전에는 불법으로 만든 최신가요 테이프를 파는 가판대가 길거리에 많았다. 여러 가판대를 돌아다니며 조잡하게 프린트된 가수와 노래 제목을 보고 듣고 싶은 노래가 많이 담긴 테이프를 사곤 했는데, 가끔은 프린트된 내용과 전혀 다른 노래가 들어있기도 했다.

'난 그 노래를 듣고 싶어서 산건데!'

짜증 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수 이름과 제목에도 오타가 다양하게 있었다. 가장 최신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불법 녹음된 테이프를 판매하는 가판대였다. 우리 때의 멜론, 우리 때의 벅스뮤직, 우리 때의 유튜브 뮤직이었다.


IMG_4738.JPG 가판대에서 팔던 최신가요 테이프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쫌쫌따리 존재하던 소규모 음반 가게엔 테이프와 CD들이 빼곡했고, 악보도 팔아서 가끔씩 뒤져보면 H.O.T. 악보를 건질 수 있었다. 공 테이프 10개 세트를 사서 라디오가 나올 때 녹음 하기도 했고, 팬들은 그런 녹음 테이프를 거래하기도 했다. 지금은 굿즈 정도로 여겨지는 테이프는 가수들이 기본적으로 발매하는 앨범 매체였다. 테이프는 많이 들으면 늘어졌기 때문에 듣는 용도로는 테이프 보단 CD가 나았다. 약 2배 정도 더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소풍을 가도, 놀러를 나가도 항상 들고 다니는 소니 CD 플레이어는 나의 애착 물건이었다.



나도 음반하고, CDP를 샀어! 어제 도착했는데, 열심히 듣고 다니는 중이야. 지금도 듣고 있어. 나도 돈을 아껴뒀다가 음반을 사.
03.03.24 현미 (중3, 16세)


나는 소리바다에서 노래를 다운 받아 공CD를 음악 CD로 구워서 CDP로 듣곤 했다. 소리바다엔 내가 음반을 구입하지 않은 많은 해외 가수들의 노래를 다운받을 수 있었다. 특히, 아빠가 좋아하시던 올드팝을 구워서 아빠가 차에서 그 CD를 즐겨 들으실 때 아주 뿌듯했다. 가끔 신청곡을 받기도 했으나 마이너한 노래라 소리바다에서 구할 수 없던 적도 있다. Sanfrancisco, Tie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Bridge Over Troubled Water, ABBA 노래 등이 기억이 난다.


오늘 희준오빠 3집이 나온다는데, 아직 음반 가게에 안 나온 것 같아. 몇 달째 궁핍한 생활로 음반을 못 사고 있어. 거의 구워 듣기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수들한테 미안함을 느껴.
03.07.28 현미 (중3, 16세)


IMG_4716.JPG 구운 CD 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즈음, 2000년대 초반에 MP3 붐이 일어났다. 미키 마우스 모양,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의 MP3가 CDP를 대체했다. 나는 MP3를 구매하지 않고, 더 이상 부품 생산이 안되어 고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CDP를 썼다. CD 플레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확연히 줄었기 때문에 더 이상 생산도, AS도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장학재단에서 아이팟을 제공받았다. 사용하는 것이 낯설어 쓰지 않고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아예 줘버린 게 되었다. MP3보다는 여전히 CDP를 고치고 싶어했는데, 서울에 사는 현미에게 용산 전자상가에 데려가 달라고도 했다.


IMG_4714.JPG 내가 애착 새파란 CDP. 이미 배터리도 고장나서 저렇게 연명해서 썼었다.


우리나라 전자제품 다 있다는 그 큰 용산에서 CDP 구하기가 힘들어졌어. 인터넷에서 사기 귀찮고 직접 보고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갔는데 CDP파는 매장이 몇 군데 없더라고. 조금 들고 다니기 힘들어도 나는 MP3보단 CDP가 좋더라. 메일이나 문자보다 편지가 좋고.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라니.
08.01.18 현미 (21세)




무언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본능적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이런 속도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준비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패러다임이 변화가 일어나는 와중에 우리는 고지식하게 아날로그를 고집했다. 작고, 편리한 MP3 보다 크고, 무겁고, 불편한 CDP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빠르고 편하고 '스마트'하게 바뀐 세상이지만 느리면서 서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아날로그에 대한 동경이 레트로 열풍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게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과의 대립이 아닐까 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모든 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호기심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두려움, 불안, 공포의 대상이 된다. 활자는 아이패드에 들어갔고, 음악은 핸드폰에 들어갔으며, 사진도 픽셀로 존재한다. 손으로 만져지지 않게 어디론가 숨어버린 무언가 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마트의 장벽 뒤에 가려져 알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내 눈앞에 보이며, 존재하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굿즈를 기다리며, 실용성이 떨어져도 구매하는 데에는 내가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는 '실물'의 요인이 있는 듯하다. 그게 바로 아날로그에 대한 이끌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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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 무언가들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들 오 : 레트로 열풍으로 2022년 비디오 테이프 박스 모양, 2023년 게임팩 박스 모양으로 앨범을 출시한 샤이니 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