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학년, 같은 단계를 함께 한다는 점에서 정말 좋아."
좋아하는 가수가 같다는 공통점을 통해 만나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지만, 덕메=친구 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어렵듯 ’덕메‘라는 연결 고리는 연약했다. 동갑이라는 공통점이 우리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훨씬 유의미한 지점이다. 나와 편지를 주고받던 사람들 중엔 동생도, 언니도 있었는데, 현미와의 편지가 가장 재밌었던 이유는 같은 학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10대의 우리는 또래에게 더 동일시하기 쉬우므로. 삶의 전부였던 학교라는 사회에서 개학, 방학, 학년이 바뀌는 등의 타임라인이 같아서 친근감을 빠르게 느꼈다. 친한 친구들과 다 떨어져서 새 학년 반이 배정 되었다거나, 과학의 달 행사를 치렀다거나, 축제 기간이라든가 등의 얘기를 나누곤 했다.
요즘 학교 생활은 어때? 나는 우리 학교에 많은 행사에 이리저리 치이며 생활하고 있어. 제일 싫어하는 과학에 달 행사 독후감을 써야 해서 진짜 싫어. 참. 우리 학교 21~23일 날 수련회를 가. 오랜만에 가보는 수련회라서 기대돼.
03.04.XX 현미 (중3, 16세)
우리 학교도 4월달 과학의 달 행사를 했어. 우리 학교는 종목이 글라이더, 고무동력기 날리기, 과학 상상화 그리기, 전자키트 만들기 이 4 종목 밖에 없어. 학교에서 독후감 베껴서 왔다고 없애버렸어. 작년까지는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전자키트를 했어. 그거 덕분에 인두에 손도 데었고 말이야.
03.05.06 여해 (중3, 16세)
10월 23일은 우리 학교 축제야. 그래봤자 중학교 축제라서 그렇게 볼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개방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자화자찬인 느낌이야. 그래도 중학교 치고는 재미있어. 뭐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한다면 올해 축제에 나가게 되었어. 기회가 돼서 두 번이나 나가는데, 한 번은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연극하는데 나가고, 한 번은 춤으로 나가.
03.10.04 현미 (중3, 16세)
근데 오늘 학교 가니까 기말고사 발표난 거 있지. 정말 슬프더라. 끝났다는 기쁨을 누릴 여유도 안 주다니. 참, 현미는 시험 잘 쳤어? 현미는 범생이 같아 보여. 03.10.10 여해 (중3, 16세)
중학교 2학년 때 만나 광란의 중3을 보낸 후 우리는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와는 확연히 달라진 학교 분위기에 당황했다. 그리고 우리도 더 이상 중학교 때처럼 지내면 안 된다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만큼 자주 편지를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어떤 시기엔 도리에 편지가 더 자주 오가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이라는 위치는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입이라는 눈앞에 닥친 초유의 사태를 회피하고 싶어 편지를 쓰곤 했다.
오늘 문득 도저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오늘 너에게 편지 쓰는 것은 금방이고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주저 없이 펜을 들었어. 비록 편지지가 아닌 연습장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나은 건 없기에 이해해 주길 바라.
06 .07.30 현미 (고3, 19세)
그래도 늦은 밤 집에 오면서 여러 생각을 하는 건 정말 혼자만의 시간으로 많은 걸 느끼게 해. 지금은 점점 해가 길어지지만 예전엔 달 보며 학교 가고, 별 보며 집에 왔었을 땐 학교에 15시간이나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더라.
04.04.23 현미 (고1, 17세)
우리나라는 너무 이과 문과 딱 부러지게 길을 나눠서 과선택이 애매해.
둘의 특징이 다 있는 과도 분명 있을 텐데 말이야.
04.08.02 현미 (고1, 17세)
나는 고등학교 와서 크게 느낀 것이 아이들이 서로를 친구 이상이 아닌 경쟁자로 본다는 것이 느껴져서 좀 슬펐어. 서로에게 경쟁자일지 몰라도 가장 큰 적은 나 자신 일 텐데 말이야. 이렇게 너랑 얼굴도 모르고 키다리 아저씨처럼 모르는 상태일지라도 편지로 주고받으며 힘이 되고 있어서 나에겐 지금 이 편지가 집으로 와있는 날 저녁엔 힘들었던 하루가 싹 사라져 버리거든.
04.05.21 현미 (고1, 17세)
하루하루는 느린데 (특히 수업시간) 돌이켜보면 정말 빠른 게 시간이야. 정말 정말 힘들 줄만 알고 쫄았던 고등학교 생활인데 견딜 만은 했던 거 같아. 아직 초반이라서 팔팔하고 싱싱한(?) 면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재밌었던 것 같아. 그렇게 호되게 공부한 적도 태어나서 처음이고 말이야.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할 때가 지금 이 3년인 것 같아. 인생의 한 과정이니까 즐겁게 보내는 게 옳은 것 같아.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
04.06.XX 여해 (고1, 17세)
벌써 2학년이 된다니. 예전에 여유가 있었는데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편지도 자주 못 보내고 말이야. 어쩌면 고2가 돼서 그저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못 보낼 수도 있겠지만, 각자 생활 열심히 하고 있는 거 믿고,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야. 내 편지가 늦어도 이해해 줘.
05.01.XX 현미 (고2, 18세)
멀어 보였던 고3이라니 정말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해. 과연 내가 인간이 아닌 고3이라던, 고3을 견딜 수 있을지 말이야. 걱정이야. 난 고2인데도 정말 이번 여름 방학을 헛되이 보낸 것 같아서. 그다지 많이 논 것 같지는 않은데 방학을 되돌아보니 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너무 허탈해. 짜증도 나고, 막 조급해지는 것 같아.
05.08.11 여해 (고2, 18세)
2006년도 1주일이 지났어. 난 중학교 때 우리 학교(지금 다니는 고등학교)를 지나갈 때면 놀랬어. 밤까지 학교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말이야. 그래서 저 사람들은 대단하구나- 했지. 나한테는 고3 시절이라는 건 없을 줄 알았던 것 같아. 이제 내가 그 유명한 대한민국 고3 수험생이 되었다니 아직도 놀랍고 신기해. 2006년도 정말 잊지 못할 해가 될 것 같아.
06.01.08 여해 (고3, 19세)
사실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나랑 현미는 동갑이기 때문에 더 '경쟁자'에 가까웠다. 수능이라는 시험을 함께 치고, 대학교의 입학생 수는 정해져 있다는 측면에서. 그런데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누군가를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현미뿐만 아니라 반 친구들도. 사실 그때는 타인이 아닌 나와의 사투였다. 나쁜 머리, 부족한 실력, 중학교 때 인포메일 코딩이나 하던 과거 그리고 밀려오는 졸음과 게으름, 모든 것에 짜증 나는 못된 성질머리.
그렇게 동갑내기 한 명은 서울에서, 한 명은 구미에서 매 순간 자신에게 지는 고3 생활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부터 편지를 주고받은 지도 벌써 4년이 지났고, 그동안 약 70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고3이라는 거 힘들지만 그래도 함께 가는 친구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고 힘낼 수 있는 것 같아. 너와 동갑이라는 게 서로 다른 곳 다른 환경에 있지만 같은 학년, 같은 단계를 함께 한다는 점에서 정말 좋아.
06.03.18 현미 (고3, 19세)
고3 언니들보다, 어린 중학교 1학년 동생보다
동갑인 너랑 말이 제일 잘 통하더라.
05.10.21 여해 (고2, 1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