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자신일에만 열중하고 우리는 없고 다들 '나'만 있는 것 같아"
-편지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전달하고자 하는 얘기를 취사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에서 친구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읽씹이 되어버리지만 편지는 그렇지 않다. 편지에는 다양한 내용이 복합적으로 들어가지만, 답장을 보낼 때 거기 있는 모든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내가 대답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답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보낸 이가 '왜 내 질문에 대답 안 해?'라고 따지지 않는다. 즉, 편지엔 읽씹도 없고 안읽씹도 없다.
초창기 편지에선 현미와 내가 가진 공통점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면서 조심스럽게 친해지고자 하는 게 느껴진다. 마치 동물들이 처음에 냄새 맡으면서 적이 아님을 확인하듯이. 현미가 생각이 많아져서 새벽에 잠을 못 이룬 다는 편지에 나도 새벽에 있는 걸 좋아한다고 답한다거나, 현미가 본 영화에 대해 나도 보았다고 얘기하면서 내가 좋았던 영화에 대해 덧붙이면 현미도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답이 왔다. 서로의 비슷한 점에 대해서 더 많이 공개하고, 비슷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며 친밀감을 쌓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오늘의 날씨에 대해 얘기를 나누듯이 말이다.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피상적인 얘기 보다 좀 더 내밀한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항기도 겪으며 기존의 생각들에 도전했고, 충돌했다. 두발 자유가 아닌 학교 교칙에 대해 불만을 표한다거나, 몇몇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을 욕한다거나, 교육 제도에 대한 깊은 회의라든가 하는 청소년기 때 가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공유했다.
이 편지 쓰고 머리를 자르러 갈려고. 머리가 빨리 기는 편이라. 자주 잘라야 해. 우리 학교는 두발 자유가 아니라서 머리가 길면 혼나.
하루빨리 두발 자유가 돼야 될 텐데. 그게 되려면 아마 내가 죽고 난 뒤에? 우리 학교가 많이 엄한 편이야.
03.04.XX 현미 (중3, 16세)
우리 학교도 두발 자유화는 아니야. 자기들 말로는 두발 자유화라고 그러는데, 교문 앞에서 길면 잡아. 황당해.
03.05.06 여해 (중3, 16세)
요즘 들어서 학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돼. 내 꿈이 교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컸을 땐 지식을 배우는 학교란 개념이 많이 달라질 것 같아. 거의 다들 집에서 컴퓨터로 공부하고 혼자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학교만 다니고 과외나 학원을 나도 다니지 않지만 혼자서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점점 미래가 될수록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학교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는 거지.
03.09.07 현미 (중3, 16세)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존경으로써 모든 말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잖아. 하지만 그건 옛 유교 사상에서 그럴 뿐이지 지금 현재에서 그것이 지나치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 학생이 다른 것을 했다는 건 그냥 자기 자존심을 건들었다는 그런 이유로써 혼내는 것일 텐데 잘못된 거야. 이럴 때마다 외국 교육제도가 참 부러웠어. 외국 선생님 수업 평가제라서 수업을 듣고 평가해. 그래서 미달인 경우 월급이 삭감되거나 다른 벌칙을 받고 잘하는 선생님은 우수 선생님으로서 다른 혜택이 주어진대. 예전에 TV에서 봤었거든.
03.10.31 현미 (중3, 16세)
우리는 정의 내리고 싶었던 문제들을 바라보는 방식의 밀도가 비슷했고, 이를 기초로 유대감을 형성했다. 권력, 성공, 행복, 평화, 전쟁 등 어떤 것 하나 명쾌히 정의 내리지 못하는 문제들을 함께 고민했다.
정의 내려지지 않는 많은 것들이 나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려니 쉽지 않더라고.
06.02.03 현미 (고3, 19세)
인간은 정말 육식동물처럼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 엄청난 힘도 없고 초식동물처럼 빠른 다리와 날렵한 몸짓도 없고, 또 로봇처럼 엄청나게 뛰어난 뇌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은 자신의 그 감정이나 생각을 이성적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게 가장 큰 힘 아닐까?
03.12.11 여해 (중3, 16세)
날마다 행복하면 진짜 행복이 뭔지 모른대. 행복하지 못하다가 행복을 느껴야 진짜로 행복하다는 말이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 현미 생각은 어때?
03.11.12 여해 (중3, 16세)
그리고 아직 제대로 이해하거나 분석하기엔 너무 어렸지만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허우적댔다. 공부를 하라고 하니 하고 있고, 해야 될 거 같아서 하고 있기는 한데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혼란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고등학교에 가며 조금 더 추상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청소년에겐 고민은 사치였다. 오지선다 답 맞추기를 할 게 아니라 10대 후반에 떠오르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사유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님은 '일단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면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할 수 있다'라고 질문에 대한 답을 '대학에 가면'으로 넘겨버렸다.
(지금 내가 4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보니 부모님의 말씀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다만)
(대학교 가보니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있긴 하더라)
성공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행복, 성공이란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거 같아. 온 세상 누구나 행복했으면 하는 부처님, 하느님 정도는 안 돼도,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적어도 나 때문이라는 조금만 이유도 있으면 더욱 좋고.
06.02.03 현미 (고3, 19세)
성공이란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봐. 성공이란 것은 정말 추상적인 것이잖아. (중략)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성공한 것이라고 보는 거지.
06.01.27 여해 (고3, 19세)
사람들은 권력을 잡게 되면 다 변하는 가봐. 절대로 청렴결백 하겠다는 사람들도 점점 지위가 높아갈수록 욕심이 생기니까 말야. (중략) 실험을 해보고 싶었어. 내가 국회의원이 되어서 '권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 역시도 변할까? 하는 실험.
06.02.08 여해 (고3, 19세)
고3의 상황에서 주위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바쁜 친구들을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또 어떤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아마 그들도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등 질문들이 많이 떠올랐을 테지만, 그게 우선순위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편지는 참 편리하다. 나의 상황과 시간이 허락할 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시간 간격을 두고 오고 가는 편지에는 앞서 말했듯 읽씹도 안읽씹도 없다.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그래서 편지에다 토해냈다. 상대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어떤 것도 상관없었다.
요즘은 상식이 통하지 않고, 비도덕적인 것이 보편화되려고 해. 어렸을 때 배운 바른생활 어린이 인가? 그건 교과서 일뿐 현실에선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아져서 상심한 적이 있어.
06.05.17 현미 (고3, 19세)
강자만 잘 사는 것 같고, 약자에겐 불평등하거나 불리했지. 난 그래서 커서 꼭 성공해서 약자를 위해 정의롭게 살고 싶었어.
06.02.03 현미 (고3, 19세)
다들 자신일에만 열중하고 우리는 없고 다들 '나'만 있는 것 같아. 각자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주며 자기 이익만을 챙긴다는 것은 정말 못된 어른들과 다름없는 것 같아. (중략) 정말 누군가가 나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world peace 미스코리아처럼 세계평화라고 말하고 싶어져.
06.04.17 현미 (고3, 1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