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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의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본다

의료와 병원에 대해 조금 더 앎으로써 더 많이 존중받는 환자가 되어보자

by 정여해

나는 대형병원 인턴이었다


인턴은 수련받는 의사라는 뜻의 수련의의 한 종류로서 보통 1년 근무하고, 이후에 또 다른 수련의 종류인 전공의 즉, 레지던트로서 3~5년 일하게 된다. 인턴은 학생이라는 그늘을 막 벗어나 근로자이자 사회인, 그리고 의사로서 병원에 소속되는 첫 스텝이다. 물론 인턴 과정을 밟지 않는 의사들도 많다. 하지만 일반의를 거쳐 전문의가 되기 위해선 레지던트 수련을 받아야 하고, 레지던트 수련을 받기 위해선 인턴 과정이 필수 이기 때문에 인턴 의사가 존재하게 된다.


인턴은 병원에서 소위 '허드렛일'을 도맡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의료 제도 하에 인턴과 레지던트로 통칭되는 수련의들은 병원에서 싼 값에 쓸 수 있는, 그리고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취급받는다. 더군다나 인턴은 1년 계약직으로 따로 의국이 없기 때문에 보호해 줄 상사도 없고, 오직 병원 소속이므로 병원 입장에서는 매우 쉽게 다룰 수 있는 인력이다. 무엇보다 인턴은 의사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의료법 상에 의료인에 해당되고, 그러므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어 의사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을 시키기에 아주 좋다. 그래서 인턴은 병원 어디에나 있다.


나는 12개월 인턴 의사로 근무하였고, 그중 4개월은 응급실, 4개월은 수술실, 4개월은 병동에서 일했다. 인턴은 병원 구석구석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걸 보고 듣는 사람이다. 의사 중에서 환자와의 접촉도 가장 많은 것이 인턴이고, 간호사와의 접촉이 가장 많은 것도 인턴이다. 학교에서 지식을 배웠다면, 인턴 기간 동안은 병원이 돌아가는 것을 온몸으로 배우며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야전이다.


2020년 의전원을 졸업하고, 입학할 때부터 들어가길 원하던 대형 병원 입사에 성공하여 1년 간 인턴 생활을 했다. 실습을 통해 거울 삼고, 책을 통해 다진 바람직한 의사를 가슴속에 새기며 첫 발을 내디뎠지만, 병원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상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의료진과 보호자, 환자 모두 루즈-루즈 하고 있는 병원


대형 병원은 전쟁통과 다름 아니다. 특히 응급실은 더더욱 소란스럽다. 환자는 너무 많고, 의료진은 너무 부족하다. 환자는 쏟아져 들어오고, 한 명의 환자도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또 다른 중증 환자가 배치된다. 혼란 속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은 쉴 새 없이 똑같은 질문들을 스테이션에서 바쁜 간호사에게 던져댄다. 간호사들은 해야 할 일을 하며 어떤 환자인지 보지도 않고 매번 같은 대답을 한다. 병원에 온 사람들은 불안과 긴장으로 예민하기 때문에 쉽게 화를 낸다. 의료진들은 매번 비슷한 말로 이들을 진정시키는 데 시간을 쏟고 진을 뺀다. 그 과정에서 의료의 질은 떨어지고, 어떤 환자들은 푸대접을 받으며 원하는 진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런 모습을 내부자로서 가까이서 바라보면 모두가 안쓰럽다.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해야 하는 의료진들, 화를 내는 보호자들, 지친 환자들... 왜 우리는 윈-윈 하지 못하고 루즈-루즈를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여기서 약하고 미천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문제의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의료 제도가 가장 큰 이유임은 확실했다. 2020년 문재인 정부의 공공 의대 설립, 한방 첩약 급여화 법안 추진으로 시작된 전공의 파업과 집단행동 때에도 제도가 문제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도란 고쳐쓰기 쉽지 않기 때문에 제도만 탓하고 있으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것이 나의 인턴 기간 내내 가졌던 화두였다. 모두가 지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 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 속에서 내가 끊어낼 수 있는 사슬고리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인턴으로 환자들과 가깝게 접하며 가장 크게 느꼈던 것 중에 하나는 의사가 아닌 사람들은 기초적인 의료 상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의무교육은 초등 6년, 중등 3년으로 총 9년 동안 ‘의료 지식’ 은 전혀 배우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부동산 투자나 펀드 등과 같은 경제 상식이 전무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환자와 보호자들은 계속 같은 것을 묻는다. '물 마셔도 되나요?', '피는 왜 또 뽑나요?', 'MRI 찍을 건데 CT는 왜 또 찍어요?' 등등.


사람들에게 약간의 의료 상식을 보태어 준다면 이런 반복적인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과정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구상했다. 일반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시간을 없애고, 그 환자에 특화된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 줄 수 있다면 의료의 질은 훨씬 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부가적인 효과로 의료 지식이 생기면 환자와 보호자의 통제력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불안감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나지 않을 수 있고, 이는 의료진과 의료 환경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이것은 다시 환자에게 더 질 높은 서비스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언젠가 환자가 될 내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더 나아가 의료 상식을 바탕으로 심도 깊은 정보 탐색을 할 수 있게 되면, 내가 앓고 있는 질병뿐만 아니라 병원 프로세스에 대해 알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 병원과 의료진들도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면 다가갈 수 있고, 다가갈 수 있으면 상호작용 할 수 있다. 환자와 의사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수평적인 관계로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욕심을 내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현재의 의료 제도에 대해 개정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 지난 파업 때처럼 '배부른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불리지 않고 의료 제도의 개선까지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의료 상식을 '앎' 은 악순환을 단절시키고, 성숙한 의료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마법의 장치가 될 수도 있다고 청사진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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