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는 무슨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넌 누구냐?
64세 남자 박리술 씨는 10대부터 술을 마셨다. 나이가 들고 일을 하면서 아버지처럼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지만, 술 없이 지내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점점 술 마시는 양과 시간이 늘어나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술만 마시게 되었다. 몇 주 전엔 울렁거리는 느낌에 술이 안 들어가더니 화장실에 가서 토하니 피가 나왔다. 그러다 말았는데, 오늘 또 피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응급실을 갔다. 의사가 와서 언제 피를 토했는지 토한 피의 양을 물어보고 갔다. 피검사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의사가 온다. 식도에서 피가 나는 것이 의심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위내시경을 본다고 한다. 내시경을 해서 피가 나는 곳을 지혈할 예정이라고 한다. 응급 내시경이라 오늘 중으로 시행할 것이고, 하지만 내시경 의사가 예약이 잡혀 있어 언제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내시경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의사가 와서 CT를 찍는다고 했고, 곧 CT를 찍고 왔다. 그러고 내시경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다른 의사가 와서 입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시경은요?"
"내시경 한다고 들으셨어요? 내시경은 오늘 안 할 겁니다."
"응급이라고 오늘 해야 한다고 아까 의사가 와서 설명하고, 싸인 받아 갔는데요."
"아니요. 오늘은 하지 않아요."
아까 들은 거랑은 또 다른 소리를 한다. 이 의사는 누구일까? 아까 싸인을 받은 의사는 누구일까?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많은 환자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특히, 의사 한 명이 근무하는 동네 병원에선 말 바뀔 의사가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겠지만, 대형 병원에서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잠깐 환자를 보고 가면서 한 두 마디씩 던지는 말이 다르다. 가끔은 왜 말이 바뀌냐고,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환자와 보호자들도 있다.
먼저, 대형병원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자. 하얀 가운은 의사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병원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있다고 하여 모두 의사인 것은 아니다. 연구실이나 실험실, 검사실이 함께 존재하는 대형 병원의 경우 실험실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병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볼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대체로 병실이나 응급실에서 마주칠 사람들은 아니다. 환자와 보호자가 볼 수 있는 하얀 가운의 의사들은 대체로 '임상의사(환자를 보는 의사)' 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PA(Physician Assistent)로 간호사나 간호조무사의 자격을 가진 사람 중에 부족한 의사 인력을 채워주는 간호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닌 애매한 '진료지원인력'이라는 분들이 있다. PA 고용 문제는 자주 이슈가 되는데, 이 얘긴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하자.
의사들도 가운을 입고 있다. 하지만 의사들은 같은 '의사'로 묶기에는 다양성이 높다. 크게 인턴(intern), 레지던트(resident), 펠로우(fellow, 임상강사, 전임의), 호스피탈리스트(hospitalist, 입원전담전문의), 스태프(staff, 교수)로 구분할 수 있다. 같은 의사라지만, 병원의 3D job을 담당하는 인턴과 최고 위치의 스태프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대체로 환자들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의사는 본인을 담당하는 교수뿐이다. 하지만 한 명의 환자에 배정되는 스태프가 아닌 의사들은 훨씬 많다.
나에게 와서 말을 나눈 사람이 가운을 입고 있음에도 의사가 아닐 수도 있고, 의사라도 여러 직급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이제 의사들의 직급과 의사소통 체계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을 이해해야 왜 의사들의 말이 바뀌는지 이해할 수 있다.
병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사들은 인턴일 가능성이 높다. 인턴은 어느 과에도 소속되지 않으며 레지던트 과정을 밟기 위해 준비하는 의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의사 직급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턴 말고 의사 불러와!'라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인턴도 의사이다. 내가 본 인턴들은 현실보다는 아직까지 교과서 속의 이상적인 세계에 익숙한 풋풋한 사람들이었다. 아직 현실의 의사들보다 좀 더 인간적이고, 환자들의 고충에 관심을 가지는 의사들이다.
인턴이 하는 일은 대표적으로 동의서를 받는 일이다. 수술 동의서의 경우 수술을 집도하는 과에서 받는 반면, 좀 더 일반적인 시술이나 검사 동의서의 경우 인턴이 받는다. 그래서 대체로 대형 병원에서 젊은 느낌이 나면서 시술에 대한 설명 및 동의를 받으러 온 의사를 보면 인턴이라고 알면 된다. 한편, 응급실에서 초진, 병실에서 주치의를 맡는 인턴들도 많이 있다.
이후 직급들은 레지던트들이 있다. 전공의라고 불린다. 레지던트들은 무슨 무슨 과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응급실에서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들을 볼 수 있고, 병실에서는 자신이 입원한 과의 레지던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응급실 레지던트들은 그날 입원하는 날에 따라서 달라지고, 병실 레지던트들은 자신에게 배당된 스태프에 따라서 정해진다. 레지던트는 과에 따라서 3~5년 과정으로 다양하고, 이후 국가에서 주관하는 전문의 시험을 치고 나면 전문의 면허를 딸 수 있다. 그래서 '~과 전문의'라는 명패를 달고 있으면 '레지던트를 수료한 사람이구나'라고 이해하면 된다.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 드디어 전문의가 된다. 대형병원에는 전문의 자격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크게 분류하자면 펠로우, 호스피탈리스트 그리고 스태프가 있다. 펠로우는 레지던트 이후에 전문의 자격 취득 후 전문의로서, 고급인력으로서 스태프가 되기 위해 수많은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를 감당하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또, 요새 대형병원에서는 호스피탈리스트(hospitalist, 입원전담전문의) 제도가 활용되고 있다. 전문의 즉, 전문의 시험을 통과한 그 과를 전문적으로 보는 사람으로, 레지던트들의 부족한 능력과 스태프의 부족한 인력을 채워주는 전문의 인력이다. 이후 우리가 익숙한 교수 즉, 스태프들이 있다. (스탭들도 레벨이 있지만 주제에서 벗어나니 일단 생략한다.)
어떤 환자들을 담당하는 체계로는 인턴 - 레지던트 - 스태프, 인턴이 없다면 레지던트 - 전문의 이렇게 두 단계로 구분될 것이다. 병원에 따라서 인턴 - 전문의로 구성되기도 하고, 오직 전문의만 존재하는 병원도 있다. 담당하는 체계는 환자를 보고, 보고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3단계 체계를 구분하면, 인턴이 환자를 보고, 인턴의 보고를 받은 레지던트가 환자를 담당하게 되며, 레지던트가 환자를 본 결과를 스태프에게 보고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환자에 대한 최종 처방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의사들의 말이 계속 바뀔 수 있게 된다. 중간에 있는 레지던트가 A를 처방했는데, 위에 있는 스태프가 A 말고 B를 하자고 하면 A는 취소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에 언급한 박리술 씨는 응급실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내시경 시술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고 하자. 그러면 인턴은 내시경 시술이 필요하니 내시경 동의서를 받을 것이다. 인턴은 처방 권한이 없기 때문에 자체 판단하에 내시경 시술을 결정할 권한이 없고,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의 판단하에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응급의학과 스태프가 판단하기에 '응급' 내시경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으면 내시경은 취소될 수 있다. 또는, 저번에 말했듯이 과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응급의학과에서 내시경 시술을 처방 내고, 인턴이 내시경이 필요함을 설명하고 동의서를 받았지만, 소화기 내과로 과가 변한 이후 소화기 내과 레지던트 또는 스태프의 판단 하에 오늘 당장 응급 내시경이 필요하지 않다면 취소될 수 있다.
환자들은 자신을 담당하는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교수'라고 알고 있지만, 그전에 레지던트 선에서 결정될 수 있는 시술들에 대해 동의서를 작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스태프들에 의해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다.
병원과 응급실, 그리고 바쁜 의료진들이 낯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한 사람들은 병원 체계에 익숙해서 다 알고 계시는데, 그런 분들은 자기가 어떤 의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지를 다 알고 계신다. 그런 분들을 보면, '아, 병원 시스템에 대해 잘 알아서 참 편하다.' 라기보다 '얼마나 병원에 많이 오셨으면 이런 거까지 다 알고 계실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어떤 사람이 나의 처방에 결정권을 가졌는지 모르겠다는 판단이 든다면 직접 물어보라. 의료법 상에서 의료진은 자신의 위치와 이름을 밝히게끔 되어 있다. 내시경을 해야 한다고 동의서를 받으려고 온 젊은 의사를 보면, 물어보면 된다. 지금 당신은 누구냐, 어떤 직책이냐, 이름은 무엇이냐 라고 말이다. 환자와 보호자가 의료행위를 하는 의료인이 누군지 알 수 있게 법적으로 보장해놓았다.
의료법 [시행 2021. 4. 8.] [법률 제17203호, 2020. 4. 7., 타법개정]
제2장 의료인
제1절 자격과 면허
제4조 의료인과 의료기관의 장의 의무
⑤ 의료기관의 장은 환자와 보호자가 의료행위를 하는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도록 의료인, 제27조 제1항각 호 외의 부분 단서에 따라 의료행위를 하는 같은 항 제3호에 따른 학생, 제80조에 따른 간호조무사 및「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른 의료기사에게 의료기관 내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명찰을 달도록 지시ㆍ감독하여야 한다. 다만, 응급의료상황, 수술실 내인 경우, 의료행위를 하지 아니할 때,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명찰을 달지 아니하도록 할 수 있다. <신설 2016.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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