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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Jun 27. 2021

혐오의 나비효과 :「너와 내가 만든 세상」전

제주포도뮤지엄전시

최근에 갔던 본태 미술관, 유민 미술관 전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서 같은 계열의 미술관이라고 생각하고 방문했으나 전시가 정말 좋았다. 역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큰 행복을 불러일으킨다는 나의 지론에 딱 맞는 미술관이다. 


두 개의 전시로 이루어져 있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이 1층~1.5층에 있고, 독일 예술가 「케테 콜비츠 아가, 봄이 왔다」  전이 2층에 있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 번째, 균열의 시작, 두 번째 왜곡의 심연, 세 번째 혐오의 파편이다.


첫 번째: 균열의 시작


여기에는 네 개의 작품들이 있다. 



"너 그 얘기, 들었어?"라고 시작되는 가십으로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개시된다. 제목은 <Us and Them>. 마주 보고 있는 거울 뒤로 새빨간 앵무새들이 가득하다. 섬뜩한 색깔을 띠고 있는 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남의 말을 따라 하면서 소문을 옮기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걔가 그랬대"라고 들리는 수많은 소문들에 그냥 귀를 닫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나. 귀가 있기 때문에 들려오는 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말을 열심히 옮기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귀가 닫혀 있을 땐 카톡을 통해 눈으로도 들려왔다. '그냥 안 전해주면 안 되겠니'라는 태도로 도망 다니자 들려오는 가십은 모두 없어졌지만 사람들로부터도 단절됐다. 그만큼 가십 밖에 나눌 이야기가 없었던 관계였던 거다. 가십이 없어도 그리고 대화가 없어도 편안한 관계는 형성하기 어렵고, 그래서 고독이 훨씬 편하게 된다. 



시각적인 작품을 지나서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은 들어가기도 전부터 들렸다. 나는 시각보다 청각에 훨씬 예민한데, <소문의 벽>은 빠르게 속삭이는 소리에 소름 돋고 트라우마가 배꼽부터 치밀어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서 너무 싫었다. <소문의 벽>에 나있는 구멍을 관음증 환자처럼 눈을 대고 들여다보면 글귀들이 쓰여있다. 가벼운 뒷담화에서 대중매체, 권력 집단이 발화했던 실제 문장들이다. 또 구멍 안쪽에는 볼록렌즈가 들어있어 글자들이 왜곡되는데, 이 역시 만들어진 소문이 과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소문, 뒷담화로 시작했을 특정 집단에 대한 추측과 선입견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정치적 조작으로까지 확장되어 객관적인 사실인 마냥 발표되었다. 손가락질부터 민족 청소까지 당한 그들이 혐오 집단이 된 이유는 성별, 문화, 종교, 피부색, 신념, 성적 지향 등으로 다양하지만, 그들에 대한 소문에는 패턴이 있다. 그들은 병을 옮기거나, 게으르고, 비윤리적이며 위험한 존재여서 우리의 안전과 신념을 위협한다는 공포와 사명감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용백 작가의 <broken mirror> 세 작품이 있다. 유리 깨지는 소리도 누군가 휘두르던 폭력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라 듣기 싫다. 총알이 날아와서 박혀 거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장면이 거울 안에서 연출된다. 이 역시 불쾌한 작품이었다. 거울 속에 내가 있고, 총알이 박히면서 거울이 깨지지만 나는 멀쩡한 모습이다. 이것이 마치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남이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기만 하는 느낌이다. 그게 영화든, 뉴스든, 유튜브든, 신문이든 간에. 



네 번째는 성립 작가의 <익명의 초상들>, <익명의 장면들>, <스치는 익명의 사람들>이다. <익명의 초상들>은 웹과 앨범에서 수집한 눈, 코, 입을 무작위로 조합해 만들어낸 얼굴이다. 명확한 형체 보단 낙서 같이 연필로 그어져 있다. 익숙한 듯 낯선 무표정한 얼굴들이 있는데, 내 얼굴 같아 보이기도 하고, 병원에서 많이 본 듯한 표정들이기도 하다. 하나씩 보면 모두가 다르지만, 그냥 뭉뚱그려 '그들'로 묶인다. 




두 번째: 왜곡의 심연


우리와 그들의 균열이 생겨 오해가 생기면 이는 곧 깊어진다. 



<비뚤어진 공감 > 은 글과 빛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글은 중국, 일본, 미국, 독일 등의 여러 국가의 혐오 발언(hate speech) 참고 문헌에서 수집한 글들이다. 혐오는 가짜 소문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작품 위에 서면 벽에 나의 모습이 벽에 나타나면서 혐오발언으로 꽉 찬다. 이는 내가 곧 이렇게 타 집단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찬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누군가가 나를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뜻처럼 보이기도 한다. 


<패닉부스>는 작은 방 안에 거울이 벽과 바닥에 붙어 있고 정면에선 영상이 상영된다. 상대를 향한 편견 그리고 확대된 증오가 학살, 테러, 전쟁으로 이어졌음을 역사를 통해 재확인시켜준다. 전시 시작부터 여기까지 보면 이 모든 것이 평범한 사람인 우리들이 평범하게 혐오가 섞인 뒷담화로 시작되어 여기까지 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 느껴졌다. 



쿠와쿠보 료타 작가의 <Lost #13> 작품이 인상 깊었다. 작은 방에 총 6명만 들어갈 수 있다. 대접, 모양 자, 테이프, 빨래집게, 체스말 등 아주 평범한 물건들이 깔려있다. 하지만 그림자에 비추어진 모습은 낯설다. 삼각자는 초등학교 시절에만 써보고 사용하지 않았던 추억의 물건인데, 이런 평범한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과장되고 또 무서운 존재로 왜곡되어 볼 수 있음을 아주 조용하게 알려준다. 




세 번째: 혐오의 파편


혐오가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 결과를 보여주는 세 번째 혐오의 파편이다. 


가장 먼저 최수진 작가의 <벌레 먹은 숲> 이 눈이 들어온다. 사람과 사물들은 구멍이 뚫려있고, 그 흔적이 땅에 흩어져있다. 누군가의 말이 총알이 되어 날아와 박혀 구멍 난 모습 같기도 하고, 제목과 함께 생각해 보면 벌레가 군데군데 갉아먹은 모양인 것 같기도 하다. 해설을 살펴보니 후자를 의도한 것인데, 무슨무슨'충'이라는 용어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특정 성별, 행동, 연령대, 직업 등을 비하하는 접미사로 활용되는 '충'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벌레라고 부르고, 그래서 벌레에게 갉아 먹힌 사람들의 자화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떨어진 조각들이 사람들이 받은 상처라면 조각들을 도로 가져다 풀로 붙여도 상처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권용주 작가의 <두사람>은 엘 리시츠키(El Lissitzky)가 디자인한 소련 홍보 전시 포스터 USSR Russische Ausstellung을 차용한 작품이다. 원작 포스터는 아래와 같다. 



출처 : http://mdesign.designhouse.co.kr/article/article_view/101/62297


애초에 저 소련인은 왜 얼굴 두 개를 이어놨을까? 그 자체가 좀 기괴한데. 


이어 독특한 위치 구성을 보이는 작품이 권용주 작가의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매달린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얼굴이 연기를 내뿜고 있는 굴뚝으로 매우 길쭉하다. 이 작품도 동독 아방가르드 작가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의 Dangerous dining companions 포스터를 차용한 작품이다. 


출처 : https://www.phaidon.com/agenda/photography/articles/2017/june/19/meet-the-godfather-of-political-memes/




왜 굴뚝일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작품 설명을 들어보니 혐오가 공장에서 나오듯 대량 생산된다는 의미였다. 정말 그렇다! 이건 참 독특한 발상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공장은 똑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지만, 말은 과장되고 변형되며 왜곡되기 때문에 공산품이라기 보단 공산품 쓰레기가 좀 더 어울릴 것 같다. 이런 느낌이 <익명>의 아이가 도심 폐기물 더미를 뒤집어쓰고 눈과 귀와 입이 막혀있는 작품과 연관되어 보였다. 



전시실의 벽처럼 들어선 <기억의 서랍>은 장샤오강 작가의 작품이다. 사람들의 가족사진, 편지 등이 붙어있다. 서랍이 어떤 건 닫혀 있고, 어떤 건 열려 있다. 제목이 <기억의 서랍>이니 누군가의 기억은 닫혀서 묻혀있고, 누군가의 기억은 열려서 의식으로 올라왔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달의 어두운 면>은 전 세계에 있었던 처참한 사건들에 대해 설명해주는 공간이다. 이미 이곳을 작은 글씨로 꽉 채울 정도로 파괴적인 사건들이 많은데, 이미 잊혔거나, 묻혔거나 혹은 현재 진행형이거나 등 다양한 이유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많을 것이다. "그 처참한 사건들에서 희생된 자들은 통계 수치로밖에 남아있지 않거나, 아직도 규명되지 않아 데이터상 존재하지 않은 자들도 많다. ... 피해자들이 지구 곳곳에 모래알처럼 존재하고 있으며 그 데이터는 지금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https://tncfoundation.org/jeju-darkside-of-the-moon



놀랍게도 마지막은 희망적이었다. 강애란 작가의 <숙고의 방>은 빛나는 책들로 가득하다. 어떤 책은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이 보이는가 하면 어떤 책은 그냥 빈 표지이다. 그 책에 새로운 얼굴이 새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또, 최근에 공부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얼굴도 보여서 반가웠다. 반짝반짝 빛이 바뀌는 작품이 아름답고,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강애란 작가를 알게 되어 기뻤다. 



전시는 1.5층의 설치미술 작품까지 이어지는데 진기종 작가의 <우리와 그들>이다. 이 작품도 좋았다. 크리스트교, 불교,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묵주, 염주, 미스바하를 든 기도하는 손을 보여준다. 결국 다 자기가 믿는 신에게 비슷한 내용을 기도할 것이다. 손, 쥐고 있는 물건, 기도하는 내용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훨씬 많은데도 그 작은 차이를 극대화하여 미워하고 죽인다. 이 작품은 기도하는 느낌과 조명과 함께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어서 아주 좋았던 작품이다. 



개개 작품들도 좋았고, 관심가는 작가도 발견해서 기뻤던 전시이다. 그에 더해 전시의 주제가 명확하고, 메시지도 뚜렷하다.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전시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며 마지막에 희망과 평화의 느낌으로 끝나는 구성도 좋았다. 


#제주미술관 #제주포도뮤지엄 #포도뮤지엄 #너와내가만든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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