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은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에 장이 열린다. 우리 아파트 장은 대단히 단출해 야채, 과일, 생선 그리고 국수나 계란, 장아찌 등을 파는 종합 상회 같은 점포까지 딱 네 개의 천막이 차려진다. 오늘도 낮에 장에 다녀왔다. 그런데 저녁 메뉴를 생각하니 사온 재료들로는 뭘 할 수 있는 게 없네. 오늘 뭘 사온 거지?
바지락 한 바구니, 파 한 단, 빨강, 노랑의 파프리카 한 봉지, 1/4 절단 양배추.
'이걸로 뭘 만들 수 있지?'
물론 음식을 쉽게 뚝딱 해내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재료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 같은 밥 잘 못하는(이하. 밥잘못) 주부에게는 서바이벌 요리 경연 대회의 미션과 다를 게 없다.
저 식재료들을 골랐을 때 분명 나에게 생각이란 게 있긴 했다. 처음엔 간단히 콩나물 밥이나 할까 해서 콩나물을 사려고 했는데, 늦게 가서 콩나물이 이미 떨어지고 없었다. 아, 계획이 틀어졌다. 큰일인데. 다른 거라도 살까 싶어 둘러보지만 갖가지 초록잎들은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익숙한 시금치는 요즘 금값이라 한 단에 6천 원이나 하니 쳐다만 보기로)
오늘 윤의 블로그에서 본 '참간초면(참기름,간장,식초+면)'이 떠올랐다. 최근 편스토랑 류수영의 '어남선생' 코너에 소개된 '간단'요리였다. 참간초면에 가장 메인 재료가 골뱅이인데, 우리 집에 언젠가 사둔 골뱅이 캔이 있으니, 오늘은 이거로? 뭐가 필요한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몇 가지 야채만 있으면 될 것 같다. 파프리카와 양배추를 얼른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오이랑 상추는 집에 있으니 패스.
야채 가게를 나오려는데 그 옆 생선 점포가 눈에 띈다. 음.. 집에 생선이 있던가? 가자미 한 마리, 갈치 몇 토막이 있긴 한데, 뭐 그래도 살 건 없나 하며 슬쩍 발을 들여놓았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이 보리 굴비는 얼마예요?"
"아, 그거 10마리 7만 원, 그 옆에 큰 건 10만 원이요."
뜬금없이 마음에도 없는 보리 굴비 가격을 물어봤다. 애초 뭔가 살 계획이 없었기에, 가게 천막에 매달려 있는 보리 굴비를 보며 인사치레로 던진 말인데 역시 보리 굴비는 비싼 애라는 걸 깨달았다. 역시나 생선 가게에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그러다 한쪽 바닥에 물이 찰랑하게 채워진 작은 바구니 속에서 물을 칙칙 뿜고 있는 바지락이 보였다. 그 모습이 나에게 물총을 쏘며 장난이라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요놈. 잡았다! 너를 데려가 바지락 칼국수를 해 먹을 테다. (무시무시한 악당 같다. 미안하다. 바지락아)
"사장님, 바지락 얼마예요?"
"한 바구니 오천 원이요"
"이거 주세요"
순식 간에 계획에 없던 바지락 칼국수가 저녁 메뉴로 당첨이다. 이젠 맞은편 종합 상회 가게로 건너가 칼국수 면만 하나 사면 되겠다. 감자랑 호박 썰어 넣고 바지락 듬뿍 넣어서 끓이면 너무 맛있을 거 같아. 기대된다.
"사장님, 칼국수 면 하나 주세요"
"아, 오늘은 다 떨어졌는데."
"이거는 뭐예요? 이걸로 하면 안 돼요?"
"이건 비빔 국수면이에요. 칼국수는 이거보다 넓어야죠."
아. 바지락 칼국수를 해 먹으려고 바지락도 샀는데, 이를 어쩐담. 칼국수도 안녕.
그렇게 해서 서로 전혀 관련이라고는 없는 바지락 한 봉지, 파프리카, 양배추, 파 한단이 내 장바구니에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슬픈 사연.
바지락은 어디갔지??!!
그래도 저녁을 해야 하잖아? 나에겐 비장의 카드 '참간초면'이 남아있다고. 골뱅이를 손질해서 소스에 담고 야채 썰어 그릇에 담으면 끝이려니 생각하던 중, 참기름이 다 떨어진 게 생각났다. 아!!! '참'간초면에 참기름이 없다니!!! 게다가 집에 남아있는 소면도 한 줌뿐이야! 이 정도 했는데도 안 되는 거면 그냥 배달 어플을 이용하라는 하늘의 계시인 건가. 생각한 세 개의 메뉴 중 하나도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니.
종종 마트에서 장을 실컷 보고 피곤해져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맛있는 걸 먹어도 왠지 다른 날 보다 맛이 없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밥하는 걸 어려워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같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그런 마음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라도 꼭 성공해야겠다. 저녁을 해 먹으려고 두 번의 장을 보는 기분이 썩 즐겁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좀 떨어진 슈퍼에 가서 부족한 재료를 더 사 오기로 했다.(집 근처에는 작은 편의점이 전부인 현실) 혼자가기는 심심하니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꼬셨다. 아이와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장바구니를 달랑달랑 흔들며 슈퍼로 향하고 있는데 아이가 물었다.
"엄마 가서 뭐 살 거야?".
"음, 콩나물이랑, 칼국수면이랑, 소면 그리고 참기름"
"나 아이스크림도 사 줘"
"좋아"
"말랑카우도 되?"
"오케이"
아이도 얻고 싶은 걸 얻었고, 세 가지에 필요한 재료들을 모두 샀으니 이제 준비는 완벽했다.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집으로 향하는 나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셋 중에 뭐 먹지?"
메뉴를 정하지 않은 채로 장에 나가면 결국 나처럼 오합지졸의 장바구니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을 살아갈 때만 목표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장을 볼 때도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장 볼 때 방황하지 않도록 우선 목표(메뉴)를 설정하자.
오늘의 나를 돌아보며, 알게 된 밥잘못 주부의 특징
1. 장은 엄청 열심히 본다 (냉장고가 비면 불안하니까, 온라인, 오프라인 다양한 업체를 컨택 )
2. 한 가지 메뉴를 정하지 못한다. (떠올린 메뉴가 별로인 이유가 함께 떠오른다. 다른 거 뭐 없나?)
3. 집에 쟁여둔 재료가 많아 보여도, 뭘 하려 해도 빠진 재료가 있다 (냉장고, 냉동실 꽉 차 있는데 왜 하나의 요리는 안 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