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목요일, 보통의 일상

보통의 날을 지켜준 사람

by 아솔

“미정아, 오늘 엄마가 언니네 애들도 데려간다. 방학이라고 애들이 집에 있어 심심하데”

“언니네 애들까지 데리고 오면 엄마가 너무 힘들지 않겠어? 우리 애들까지 넷인데?”

“그까짓 게 뭐 힘들어. 지들끼리 만나서 놀 텐데 뭐.”

“알겠어요. 엄마, 추운데 조심히 와”




1월이라 날도 추운데 조카들까지 데리고 온다는 엄마의 연락에 미정의 마음은 반갑기도 하고 무겁기도 했다. 매일 분당까지 지하철로 오가는 것도 힘들 텐데 뭘 언니네 애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오는지. 엄마는 정말 지치지도 않나? 평소 수영, 마라톤 등으로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한 덕분에 겉모습은 60대 후반의 아주머니들처럼 쌩쌩해 보이긴 하지만, 엄마도 벌써 70대 후반인데. 엄마는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거지. 정말 믿고 싶지 않다. 더는 엄마를 고생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그럼 우리 애들은 누가 봐주지? 그만, 생각은 여기까지. 어차피 해결할 마음도 없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빚진 마음이 또 스멀스멀 올라오려 하길래 얼른 이어지는 생각을 멈췄다. 아이가 클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스스로 설득하고 언제나처럼 못 이기는 척 넘어가기로. 오래간만에 조카들이 집에 온다니 일찍 퇴근해서 맛있는 거나 먹어야지.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근무한 지 올해로 15년 차가 된 미정은 요즘 사내 게시판 공고를 들여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승진 인사 때문이다. 다른 회사 같으면 승진 경쟁이 치열해서 떨어지는 일이 숱하게 일어난다지만 미정의 회사는 연차가 쌓이면 대부분 승진하는 분위기라 승진 자체가 대단한 개인의 성과는 아니었다. 예정대로라면 12월 말에 인사 공고가 나고, 1월부터 윤 부장으로 불렸어야 했는데, 승진 인사는 여태 깜깜무소식이다. 왠지 자꾸 신경이 쓰인다. 인사팀은 왜 이리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건지. 하여간 새로운 사람이 많이 들어오더니 회사 시스템이 엉망이라니까. 설마 이러다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웬 망신이야. 승진을 안 시켜주면 회사를 나가라는 소린가? 이제 마흔으로 한창때인데 회사를 떠나라고? 오, 아냐. 상상하기도 싫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얼른 집으로 향했다. 미정의 집은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거리로 회사와 가까웠다. 붐비는 퇴근길 속에서 핸들을 잡은 무의식이 막히지 않는 길을 찾아 안내하는 동안, 미정은 조카들한테 저녁으로 뭘 시켜줄지 머릿속으로 온갖 메뉴를 스캔하기 바빴다. 메뉴 고르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데. 치킨? 피자? 족발? 아, 역시나 못 고르겠다. 일단 집에 가서 물어보자. “애들아, 엄마 왔다. 엄마! 저 왔어요!” 현관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응? 아이 넷은 벌써 4인용 식탁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엄마는 식탁 한쪽에 서서 가시를 발라 낸 생선 살을 아이들 밥그릇에 차례대로 올려주며 미정에게 말했다. “애들 밥 벌써 다 먹였지. 네가 괜히 신경 쓸까 봐.” 미정의 엄마는 늘 그랬다. 일하는 미정이 힘들까 봐 최전방에서 미정의 크고 작은 짐들을 대신 짊어지곤 했다. 미정도 이런 엄마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엄마에게 어찌 보답할까.



“미정아, 승진 발표 언제 나온다는 얘기 없어?” 밥을 먹으려고 식탁 앞에 앉은 미정에게 엄마가 물었다. 요즘 엄마의 최대 관심거리. “몰라. 도대체 왜 발표를 안 하지? 이번에 승진이 안 되는 건가? 너무 기대하지 마. 부장 승진이 쉬운 일인가 뭐. 요새 기준도 엄청 깐깐해져서 승진하기 어려워졌어.” 미정의 회사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믿는 엄마에게 당신의 딸이 얼마나 큰 자랑이고 기쁨인지 알고 있음에도 미정은 오히려 승진이 안 될 수도 있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물론 스스로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왠지 더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생색내고 싶었다.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대기업에서 부장 승진까지 한다면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엄마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될지 알고 있기에 미정은 이렇게 해서라도 빚진 마음을 털어내고 싶었다. 그러니 이벤트는 실제보다 극적이어야 한다. 미정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엄마는 딸에게 혹시나 부담을 줄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고, 좀 기다려 봐. 대기업 부장이 어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자리니. 그리고 그까짓 거 안되면 어떠냐.” ‘엄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좀만 기다려. 내가 조만간 부장 됐다고 바로 알려줄게.’ 미정은 엄마를 향해 씽긋 미소를 지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촌들과 노느라 미정의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은이는 평소 좋아하는 슬라임을 책상에 잔뜩 펼쳐놓고 사촌 언니와 커다란 바닥 풍선(바풍) 만들기에 푹 빠져있고, 2학년이 된 오빠는 거실 소파에 배를 깔고 누워 일곱 살 지율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지율이는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는 오빠가 좋은지 옆에 딱 붙어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평온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워킹맘의 일상 치고는 이만하면 꽤 성공적인 거 아닌가? 미정은 자신이 일도, 육아도 모두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어깨가 으쓱했다. 그때였을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사이에서 엄마의 작은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는 엄마의 고단함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평온하게 느끼던 보통의 날들은 엄마의 고단한 일상과 맞바꾼 날들이었을지 모른다. 미정은 아이들 방에서 자고 있는 엄마 옆에 가서 웅크리고 누웠다. 엄마를 꼭 안아보고 싶은데, 어쩐지 부끄럽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마의 한쪽 팔을 미정의 두 팔로 감싸 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엄마는 무척이나 고단했는지 딸이 옆에 왔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미정은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애틋한 마음이 꽉 차올라 눈물이 맺혔다.


미정의 보통의 날을 지켜준 건 바로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