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개항장과 차이나타운 둘러보기 with 30년지기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고 하면 쉽게 수긍이 갈 만큼 나는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이주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옛 친구를 만나려면 내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누군가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는데, 내가 타지에서 홀로 육아와 커리어를 병행하는 딱한 처지이다 보니 먼길을 마다 않고 이동하는 것은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서는 비행기를 타거나 몇 시간씩 운전을 해서, 한국에서는 KTX나 고속버스를 타고 찾아와 준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학창 시절 배웠던 공자님 말씀에, 멀리서 찾아오는 벗이 있으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아), 라는 것이 있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이만큼 기쁘고 즐거운 일도 드물었다. 그래서 나도 기회가 될 때마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는 기쁨을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한 상대는 인천 송도의 한 대학에 근무하는 친구였다.
그녀와 나는 30년 전에 처음 만났다. 학교에서 두 시간 거리인 우리 집에 와서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은 적이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결혼과 출산 같은 인생의 중대사도 서로 챙기지 못할 만큼 소원하게 지냈다. 몇 년 전 새로운 연락처를 알게 되었지만 곧 친구가 캘리포니아에서 1년을 보냈고, 그 다음엔 코로나 19가 터져 우리가 만날 기회는 자꾸만 뒤로 미루어졌다. 이제 팬데믹도 상당히 잦아들었고, 마침 나는 안식년을 맞았고, 서울의 서쪽 코너에서 지내고 있으므로 인천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20여 년만에 그녀를 만나겠다고 훠이훠이 길을 나서게 되었다.
내 주변에서 가장 예술가적인 기질이 넘쳤던 친구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사랑했고, 카페에 몇 시간씩 앉아 있을 때는 커피를 추가로 주문해 마실 줄 알았으며,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르바이트와 취업 문제로 허우적거리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누추한 현실보다 1미터쯤 높은 곳에서 고상하게 살아가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변함없이 뽀얀 피부에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우아한 검은색 원피스 차림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나는 단숨에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학창 시절 소설을 써서 대학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했던 그녀는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한 후 교수가 되었다. 오래전 그녀의 자취방은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소설책과 시집은 물론 제목만 봐도 학구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책들로 가득했었다. 그녀의 연구실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교수 연구실보다 많은 책들로 가득하였는데, 내 기준으로는 족히 '고문서'라 부를 만한 자료들도 많았다. 그 많은 책들 사이에도 테이블은 빨간색의 보온병과 티슈케이스, 방향제와 꽃병 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책 한 권과 아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사 왔을 셰익스피어 컨셉의 주방용 수건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녀의 학문적 정체성과 개인적 취향이 모두 담긴 훌륭한 선물이었다.
송도는 갯벌을 메워 만든 간척지 위에 세워진 도시라, 자연발생한 도시들과는 달리 광활한 평지 위에 서있었다.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 역시 전체 캠퍼스가 평평하여, 한국의 다른 대학들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국토의 70%가 산악 지형이라는 나라답게 우리나라의 많은 학교들은 등교가 곧 등산인데, 이 학교에서는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건물 간 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학교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 동해만큼 물이 맑고 푸르지는 않지만 갈매기는 강릉보다 훨씬 많았다. 창문 너머로 바다가 내다 보이는 식당에서 우리는 지나간 세월을 빠르게 되감기하면서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들을 반추했다.
바다를 내려다 보며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인천 개항장을 향했다. 인천개항장 문화지구는 1883년 조선이 개항을 하면서 형성된 지역으로, 당시에 건축된 일본풍 건물들이 잘 복원되어 있다. 또 항구 주변 창고들은 개조하여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근대를 주제로 하고 있어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둘러볼 만하다. 우리가 커피를 마신 곳은 3층짜리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는데, 신발을 벗고 협소하고 가파른 계단을 기어오르면 2층과 3층은 다다미방을 구경할 수 있다. 130년 된 건물을 복원하여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데, 안에서 보나 밖에서 보나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구동매가 살았던 집과 비슷하였다. 팥빙수와 단팥죽이 메인 메뉴인 카페인데, 배가 부르고 카페인이 절실했던 우리는 엉뚱하게도 커피만 마시고 나왔다.
다음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한국근대문학관이었다. 근대문학관은 1894년부터 1948년까지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형성과 역사적 흐름을 잡지 형식으로 구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신체시를 대표하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신소설을 대표하는 이인직의 <혈의 누>로 시작하여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더냐"는 대사로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 대본까지 그 시기 작품들의 원본과 사본들이 흥미롭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혈의 누>는 팝업북 형태로 이야기 속 주요 장면을 전시하고 있어 아이들도 눈여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는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격동적인 시기였기에 문학계에도 커다란 변화들이 많았고, 여러 가지 시도가 압축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잠깐 둘러본 전시관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층 고양된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을 나설 수는 있었다.
개항장 문화지구 바로 옆에는 대규모 차이나타운이 있다. 온통 붉은색과 금색으로 칠해진 가게의 간판들과 곳곳에 서 있는 거대한 문들이 중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청의 치외법권 지대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끝까지 가보니 바로 길 건너에 인천역이 있다. 항구와 기차역을 끼고 있는 최고의 입지였던 것이다. 코로나 19 여파인지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가게들 중에는 문을 열지 않은 곳도 꽤 있었다. 시간이 늦어 짜장면 박물관은 입장을 할 수 없었다. 평평하기 그지없는 송도와는 달리 이곳에는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상당히 많아서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되었다. 특히 <황제의 계단>은 꼭대기에 선린문까지 세 개의 층계참이 있을 정도로 계단이 많고 가팔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중국에 가본 적이 없는데, 작은 중국을 체험한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나눠 먹을 선물로 친구가 공갈빵을 사 주었다. 대학 시절 학교 근처 지하철역 입구에 공갈빵 장수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중국 호떡이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 공처럼 부풀어 오른 딱딱한 빵에 속이 비어있는 것이 재미도 있고 맛도 좋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저녁도 먹고 하룻밤 자고 가라는 친구의 제안을 사양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혼자 집을 지키는 노견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강릉에서 긴 휴가를 보내며 뒷전으로 미루어둔 남편과 딸아이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니 노견은 건재하나, 퇴근한 남편은 많이 서운했던지 표정이 좋지 않다. 내일부터는 한동안 가족에게 정성을 다하기로 하고, 일단은 공갈빵으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해 보았다. 딸아이가 용감하게 주먹으로 빵을 내리쳤는데, 너무 세게 친 나머지 파편이 이리저리로 튀었다. 덕분에 실컷 웃으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주말이 지난 후 친구에게 꽃바구니를 하나 보냈다. 인천으로 가는 날 들고 가려다가 망가뜨리지 않고 가져갈 자신이 없어서 미루어 두었었다. 전국의 모든 꽃집은 월수금 새벽에 새로운 꽃을 배송받는다. 주말에 꽃을 사는 것은 썩 현명한 일이 아니다. 월요일 아침 오픈 시간을 기다려 송도에서 가장 잘한다는 플로리스트에게 주문을 넣었다. 피치 파스텔 계열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좋은 사이즈를 골랐다. 무더위에 이 꽃이 며칠이나 갈지 모르지만, 우리의 우정은 오래가기를 소망하며. Cheers to our 30 ye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