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일정 후 여의도 특급 호텔 망고빙수
어떤 위인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고 하셨는데, 저는 하루라도 외출을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혀요. 다행히 키우는 강아지가 있어 매일 산책은 나가지만, 만나는 사람 하나 없이 종일 혼자 있으니 정말 입병이 나네요. 신기합니다.
다행히 오늘 오후에는 업무상 광화문에서 회의가 있고, 저녁에는 생일을 맞은 친구와 식사 약속이 있었어요. 광화문 주변에는 시위가 많기 때문에 웬만하면 지하철로 이동을 하는데, 저녁 약속 때문에 부득이 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늘 지하로만 다니다 보니 시내 지리도 잘 몰랐고, 목적지에서 업무를 마치면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운전을 해서 가니 분위기가 전혀 달랐어요. 다행히 날씨도 좋더라고요.
광화문 회의에는 오래 전에 함께 공부했던 선배도 참석자로 오셨어요. 일이 끝나고 커피 한잔을 나누며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했어요. 요즘 아주 중요한 자리를 맡으셔서 공사다망하신데, 어제 하루 시간이 나서 회의에 오셨다고 해요. 제가 참 복이 있습니다! 십수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매우 야위었던 모습과 달리 얼굴이 후덕해지고 품위가 생겨서 정말 반갑고 좋았습니다.
선배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오니, 길 건너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공공건축 전시회를 하고 있었어요. 저녁 약속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한번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라, 저는 재빨리 지하도를 찾아 길을 건넜는데, 나와 보니 지상에 멀쩡한 횡단보도가 있더라고요.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른 것이라 스스로 위안을 하며 전시를 둘러보았어요. 공공건축이란 "공공기관이 건축하거나 조성하는 건축물 또는 공간환경"을 말한다고 하는데, 학교나 도서관, 공원, 체육관 등이 해당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중 잘된 사례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우리 나라 좋은 나~라"라고 흥얼거리게 됩니다. 이 전시에 나온 곳들을 둘러보는 여행도 좋을 것 같아요. 몇가지만 나열해 볼테니 관심있는 분들은 검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양천공원 책쉼터
-배봉산 숲속 도서관
-경의선 숲길 공원
-북촌마을 안내소
-오류2동 작은 도서관
-성동 책마루
-맘껏숲+맘껏하우스
전시의 규모가 아담해서 둘러보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시관 뒤쪽에는 뭐가 있나 몇발짝 산책을 해 보았어요. 스페인 기와를 얹은 이국적인 석조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대단히 크지는 않지만 나름 정원도 갖추고 있었어요. 알고 보니 대한성공회 대주교좌대성당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종교시설이라 조심스러워서 들어가지는 않았는데요, 서울시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이제야 알았다니 반성이 되기도 했어요. 바로 길 건너에 있는 건물에 수십번을 왔는데, 이렇게 둘러볼 생각을 한번도 안 했네요. 성당 바로 옆에는 수녀원도 있었어요. 성당과는 달리 한국적인 색채가 짙은 건물이었어요. 높다란 출입문은 굳게 닫혀있는데, 그앞에 보라색의 쿠팡 보냉팩이 놓여있었어요. 수녀님들은 무엇을 주문해 드시나 호기심이 들었지만 불경스러운 짓인 거 같아 들여다 보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되어 친구를 만나기로 한 여의도로 이동하였어요. 생일을 맞은 친구가 특급 호텔 망고빙수를 꼭 먹어보고 싶다고 하여, C호텔 37층에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습니다. 몇년 전에도 이 친구가 크게 한 턱 낼 일이 있어 이 호텔에 가본 적이 있는데, 지하철을 타고 가서 어찌나 헤맸는지! 이번엔 내 차를 운전하여 내비의 안내에 따라 멋지게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 안내에 따라 도착한 주차장 입구로 들어왔건만 그곳은 화물 트럭 주차장이었어요. 간혹 저처럼 잘못 들어온 승용차도 있었지만, 주차 칸 하나하나가 화물차를 위해 엄청 길게 그려져 있고,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도 없었어요. 그냥 주차를 할까 하다가 모냥 빠지게 들어가고 싶지 않아 운전을 해서 왔는데 그럴 수는 없었어요. 주차장을 빠져나와 우회전을 거듭하여 다시 호텔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아까 그 주차장 입구를 패스하여 발레파킹을 해주는 정문으로 갔어요. 직원은 보이지 않고, 차량은 혼잡하여 조심조심 통과했더니 정면에 주차장 출구 사인이 보이네요. 도대체 입구는 어디란 말인가, 하면서 다시 큰 길로 나가서 우회전을 거듭하였어요. 호텔은 IFC몰 1, 2, 3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에 까짓거 그냥 쇼핑몰에 주차를 해도 되는데, 괜한 오기가 생겼거든요. 3차 시도 끝에 호텔 정문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직원들이 보였어요. 문의하니 친절하게 1시 방면에 보이는 입구로 가라고 하네요. 그런데, 방금 전에 출구 밖에 안 보인다고 지나친 바로 그곳이네요.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출구 표시 오른쪽에 입구 표시도 있었어요! 아까는 도대체 왜 못 봤을까. 내 머리를 내 손으로 쥐어 박고 싶은 것을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내 머리를 내 손으로 쥐어박고 싶은 것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차장을 진입하면서 보니, 이 주차장은 IFC Mall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IFC Mall 1, 2, 3와 C호텔이 하나의 블록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상의 건물은 넷으로 구분되지만 지하 주차장은 네 건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거대한 규모였던 것이지요. 방문객들이 목적지 건물 가까이에 주차할 수 있도록 주차장 기둥에 서로 다른 색이 칠해져 있었고요. 허탈감이 밀려오던 중, 절정은 호텔 주차구역으로 표시된 곳이 만차라서 결국 IFC 2 구역에 주차를 한 것이었어요. 아, 어쩜 이리도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에너지를 낭비했을까 자괴감을 느끼면서 주차를 마치고 쇼핑몰로 이동하였어요.
다행히 아직도 약속시간까지 여유가 조금 있었어요. 특급호텔에서 밥을 산다는데, 생일 선물도 없이 그냥 가는 것은 아무래도 경우가 아닌 것 같았어요. 마침 쇼핑몰에는 유럽 브랜드의 화장품 매장이 보였어요. 선물이란 모름지기 내 돈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있으면 좋겠다 싶은 것을 주라고, 어떤 현명한 친구가 말해 준 적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내 돈으로 사서 내가 쓸 일은 없는, 사치스러운 핸드크림을 선물로 샀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브랜드는 남 보는 데서 한번씩 쓰윽 꺼내어 주변의 반응을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선물을 받는 친구도 특급호텔을 일상적으로 들락거리는 사람은 아니고, 평소 무척 알뜰한 편이라 자기 돈으로 이런 물건을 사지는 않아요. 그래서 재미있는 선물도 될 것 같았어요.
선물 포장이 끝나니 생일인 친구가 호텔에 도착하였다는 연락이 왔어요. 아직 예약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1층 로비에서 만났습니다. 천정이 3층 높이 정도로 시원하게 뚫려 있는 멋진 로비에 우아한 단색 원피스를 입고 목에는 트윌리를 두른 친구가 앉아 있습니다. 내 옷차림이나 머리가 이 자리에 안 어울리나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가슴을 쭉 펴고 모델처럼 성큼성큼 자신있게 걸어보았어요. 역시 패션의 완성은 자신감이지요.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으니 나머지 한 친구가 왔어요. 내가 좋아하는 새와 벌레, 꽃과 나무가 그려진 멋진 원피스를 입고, 오다가다 샀다는 반짝이 핸드백을 들었는데 그 자리에 참 잘 어울리는 복장이었네요.
삼총사가 다 모였으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37층으로 올라갔어요. 왜들 그리 강변뷰, 한강뷰를 외치는지 알겠더군요. 한강과 남산타워가 정확히 보이는 위치에 예약된 테이블이 있었어요. 생일인 친구의 목표는 망고빙수였고 다들 운전을 해서 왔기 때문에 술은 필요 없었어요. 물도 그냥 시원한 정수로 주문을 하고, 식사는 고민할 것도 없이 메뉴판 제일 위에 있는 land and sea라는 메뉴를 골랐어요. Land and sea, 우리 말로 하자면 산해진미가 되겠네요. 조명도 어둡고, 메뉴판 글씨도 작아서 돋보기를 쓰지 않고는 구체적인 설명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이름을 보건대 고기와 해산물이 나오려니 했는데, 예상대로였습니다. 소고기와 랍스터, 전복을 모두 그릴하니 조금 퍽퍽했지만, 기름기 없이 건강한 음식이었습니다.
우리 테이블은 피부가 하얗고 이마가 반듯한 남자 직원이 서비스를 해주었어요. 마스크를 쓴대다 조용조용 얘기를 해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어요. 그 직원을 보니 어학연수 중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한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 젊은이도 20년쯤 시간이 흐른 후 어떤 멋진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서빙 직원에게서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식사가 거의 끝나고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망고빙수가 나왔습니다. 드라이 아이스를 깔았는지 하얀 기체가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이중 접시 위로 손잡이가 달린 투명한 커버까지 씌워 등장을 하였어요. 생일 케익 대신이라고 생각하며 촛불은 없지만 소원을 말하게 한 후, 다들 숟가락을 들고 덤볐어요. 잘 익은 생망고를 얇게 슬라이스하여 부드럽고 향긋했어요. 망고 아래 쪽에는 밀크티를 포슬포슬한 눈처럼 분쇄하여 수북하게 쌓았고요. 마실 때보다 이렇게 얼려서 분쇄한 밀크티가 훨씬 향기도 좋고 맛도 좋더군요.
식사를 마친 후 화장실에 들렀어요. 서울시내에서 이렇게까지 공간을 낭비해도 되나 싶게 커다란 화장실이었어요. 프라이버시가 완전하게 보장될 수 있도록 넉넉한 공간에, 문과 변기 사이를 가벽으로 분리해 놓았어요. 손을 씻는 곳은 김치 담그는 대야만큼이나 컸어요. 조금 위축될 만큼 사치스러운 곳에서의 한끼 식사를 마치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며 헤어진 후 집으로 향했어요.
집에 와서 보니, 생일을 맞은 친구가 그 사이 선물 사진으로 카카오톡 프사를 업데이트했네요. 세 시간 가까이 함께 했는데도 못다한 얘기들이 카톡방을 채웁니다. 하루라도 외출을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히는 저인데, 오늘은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았네요. 내일 하루는 집에만 있어도 입병이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