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주 작가의 [절친대행]이라는 단편소설은 혼자서도 잘 지내는 능력인 '혼자력'이 부족하여 돈을 내고 친구를 샀다가 겪게 되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나의 혼자력도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싶어, 요즘은 혼자력 향상에 힘쓰고 있다. 오늘은 딱히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누구를 불러내기에 적합한 날씨도 아니어서 혼자력을 길러 보기로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딸아이가 재수하는 동안 베이스캠프처럼 사용하기 위해 급하게 마련한 곳이라 동네를 구석구석 알지는 못한다. 아침저녁으로 13살 노견인 클로이를 산책시키며 둘러보고는 있지만 아직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오늘은 길 건너 예스24 중고서점에 가보기로 했다. 중고서점이라면 [유열의 음악 앨범] 영화에서 현우(정해인)가 일하던 헌책방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커피도 판매하고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테이블도 있다. 어제부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와 도리스 메리틴의 '아비투스'를 읽고 싶었는데, 혹시 여기서 구한다면 돈을 아낄 수도 있겠다.
서점에 들어서니 여느 서점과 다르지 않게 입구 쪽에 베스트셀러가 진열되어 있다. 강릉에 지내는 동안 읽었던 'H마트에서 울다'가 진열된 것을 보니, 최신 베스트셀러가 맞다. 또, 중고서점이라고는 하지만 책 상태는 아주 좋았고, 심지어 비닐포장도 벗겨지지 않은 신간 그대로인 경우도 있었다. 놀랍게도 나의 첫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가 쓴 책도 진열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물론 업계에서 레전드 같은 존재였다가 갑자기 퇴사를 하는 바람에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작가 소개를 보니 여전히 광고기획자로 열심히 일하고 계셨다. 내친 김에 구글 검색을 해보니 최근에 그 책에 소개한 내용으로 EBS에 출연까지 하셨다. 선배의 얼굴에는 부정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중고서점인지라 아무래도 책의 종류는 다양하지 않아, 내가 찾는 책들은 없었다. 대신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하나 업어봤다. 자칭 타칭 '과알못', 과학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거시적으로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 대해 소개하는 책은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 믿어본다. 가격은 16,750원. 정가 25,000원에서 30% 할인된 가격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보통 10% 할인을 해주니 조금 보탬이 되기는 한다. 회원가입을 하면 20%를 적립해 준다니, 귀찮아하지 말고 오래전 가입한 회원 정보를 찾아보아야겠다.
책이 너무 무거운지 책을 집어 들던 엄지 손가락 관절이 찌릿하니 아프다. 요즘 게으름을 피우느라 누워서 책을 좀 봤는데,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면서 보아도 간혹 엄지 손가락 두 개로 책을 받쳐 들고 있기도 했다. 그탓인지 며칠 전부터 양쪽 엄지의 관절이 좌우 대칭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꽤나 큰 정형외과가 보였다. 미룰 것 없이 얼른 검사를 받는데 좋을 것 같아 병원으로 직행했다.
얼결에 들어간 병원인데, 수술용 로봇을 다섯 대나 구비한 척추 관절 전문 병원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번호표를 뽑도록 안내를 해주고, 정해진 동선을 순서대로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접수를 하고 예진실로 가니 간호사가 엑스레이실로 안내를 해준다. 양쪽 손가락이 잘 나오도록 여러 가지 포즈로 촬영을 하였다. 엑스레이 촬영 기술도 많이 발전을 하였는지, 위험하다는 표시도 안내도 없고, 특수 조끼도 입지 않으며, 심지어 기계가 내 손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다 끝났다는 얘기를 듣고 대기실로 돌아가 내 순서를 기다렸다.
처음 온 사람답게 대기실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10년 전쯤에 무릎이 아파 대학병원 정형외과를 간 적이 있는데,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 "젊은 사람이 여기 왜 왔어요? 여긴 할머니 할아버지나 오시는 데야!" 하며 면박을 주신 기억이 났다. 이 병원 대기실에서도 나는 아직 무척 젊은 축에 들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인공 관절이니, 수술이니, 입원이니 하는 얘기가 들려오니 '나이롱 환자'가 된 것 같았다. 이 정도 통증으로 이렇게 큰 전문병원에 오는 게 아니었나 보다.
대기가 길어지니 병원 홍보용으로 걸어놓은 포스터들이 눈에 띄었다. "관절염 없는 행복한 세상"이라는 슬로건에서 나름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래도 비싼 홍보대행사를 쓰지는 않는 것 같다. 그 병원의 의사들이 발표한 논문도 홍보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가도 건강보다 연구 실적을 걱정해야 하는 내 처지가 딱하기도 했다. 환자 중에 저 논문을 읽어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마는 "최고의 의료진에게 최첨단 진료를 받고 계십니다"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요즘은 의사가 나보다 젊은 경우도 많다. 오늘 만난 의사도 그랬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최근에 특이한 사항이 있는지 묻길래 아픈 부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대답을 하고, 게으름 피우느라 누워서 책 들고 본 사실도 실토했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뼈나 관절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류마티스 관절염을 걱정한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왜 류마티스가 아니라고 확신하는지와 류마티스를 의심해야 할 상황을 알려주었다. 엄지뿐만 아니라 열 손가락이 다 뻣뻣하게 굳어지고, 그런 증상이 석 달 이상 지속되면 그때 의심하라고 했다. 류마티스는 아니지만 통증을 관리하기 위해 소염제를 처방해 주었다. 의사가 참 소통 능력이 뛰어나고 믿음직하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는 진료에 집중하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이리저리 여러 각도로 찍은 내 손가락의 뼈가 참 예뻤다. 첫 직장에서 일할 때, 갑자기 손 모델을 구할 수 없어 급한 대로 내 손을 촬영해 쓴 적이 있다. 그 사진이 괜찮다고 결국 재촬영을 하지 않는 바람에 모델료를 아꼈다. 어느새 손가락에 살이 빠져나가 주름도 많아지고 마디도 불거졌지만, 엑스레이로 찍어놓으니 그 속에 숨어 있는 뼈는 여전히 뽀얗고 모양도 반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젊음과 아름다움이 빠져나가는 중에 뼈라도 예쁘다고 위안을 받는 내가 좀 우습다.
중고서점을 향할 때 마음에 두었던 책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궁금증을 달래려고 유튜브에 관련 강좌를 찾아보았다. 강신주 박사의 강의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상들이 있는데, 양질의 강의 영상은 토막토막 나 있어서 산만하다. 북튜버라고 하는 유튜버들이 만든 영상은 프로덕션의 질은 높은데 그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요약 전달하는 수준이다.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감탄도 하고, '구별짓기'와 '아비투스'가 새삼 조명을 받게 된 사회적 분위기에 안타깝기도 했다. 서점에서는 과알못임을 인정하며 책을 구입했는데, 강신주 박사의 강의를 들어보니, 과학뿐 아니라 서양사상사도 공부를 해야겠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고, 점점 더 배워야 할 것이 많아진다.
뽀로롱~
오늘도 여느님의 혼자력이 +1 증가하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maryna_maliut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