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도 떨치고 나가면 얻게 되는 것들
우리집 반려견 클로이의 별명은 탈출 장인인데(참고 강릉일기 #15), 생각해 보니 나는 외출 장인이다. 하루라도 외출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그게 구내염이 생긴다는 뜻이라면). 나는 갱년기를 맞은 친구들에게도 외출을 장려하는 외출 예찬론자인데,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외출은 기분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쩌다 한번은 괜찮지만 종일 집에만 있는 날들이 계속되면 기분이 울적해지고 만사 의욕이 없어진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몇날며칠 집에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내 절친 중에 한명이 이렇다. 하지만 꽤나 내성적이라 자부하는 사람들도 며칠 집에만 있으면 알 수 없는 우울증과 의욕 저하가 찾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가까운 친구 중에 하나는 산후 우울증을 심하게 앓아서 한동안 약물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약물과 함께 처방한 것이 산책이었다. 무조건 매일 나가서 한 시간 이상 걸으면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나는 한번 기분이 울적해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것을 경험을 통해 알기에, 되도록이면 그렇게 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쪽을 선택한다. 외출을 할 때는 가급적 많이 걸을 수 있는 곳으로 간다.
둘째, 외출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절약이 되기도 한다. 집에 앉아서 홈쇼핑 채널이나 온라인 쇼핑몰을 쳐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소비 본능이 꿈틀댄다. 안 그래도 예쁘고 늘씬한 모델들을 포토샵으로 더 뽀얗고 길쭉하게 만든 이미지들을 보고 있으면, 그녀들이 입고 있는 옷을 나도 입고 싶다.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고 주문과 결제를 클릭하면 2-3일 만에 배송이 오는데, 하나같이 옷감도 핏도 기대에 못 미친다. 반품 신청이 귀찮아서 우물쭈물하다 보면 입지도 못할 옷이 옷장에 쌓인다. 때로는 주문한 옷을 모두 다 반품하기 미안해서 한두 개는 두고 나머지만 반품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왕복 배송료를 지불해야 한다. 애초에 무료 배송을 받기 위해 이것저것 추가해서 주문했던 보람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떨치고 일어나 백화점에라도 나가게 되면 일단 가격이 만만찮아 소비 욕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옷을 직접 걸쳐보면 나에게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고 소비 욕구가 한번 더 하락한다. 나는 백화점에서 쇼핑백을 들고 올 때보다 빈 손으로 올 때가 많은 사람이니, 나가는 것이 돈 버는 것이다.
셋째, 외출에는 우연한 발견의 기회가 있다. 전문 용어로 서렌디피티(serendipty)다. 어제도 동네 중고 서점에 나갔다가,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직장 선배가 낸 책을 발견했다. 그동안 소식이 궁금하여 한번씩 구글 검색을 해 봐도 행적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덕분에 잘 지내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반가웠다. 몇년 전에는 서울경찰청 앞에서 길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나의 대학 동창이었다. 십수년 만에 처음 만난 것이라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는 광화문 시청 앞에 나갔다가 공공건축 전시회도 발견했고, 성공회 성당과 수녀원도 발견했다. 강릉에서는 엄청 쏟아지는 비를 뚫고 바닷가에 나갔다가 5만원권 지폐를 줍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서렌디피티는 아니지만, 내 삶에 기쁨과 활력을 준다. 가만히 집에만 있었다면 이런 우연한 발견과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밖에 나가면 돈 쓴다고 집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사람을 만나면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한다. 함께 먹고 마신 비용을 어떻게 나누어 부담할 것인지를 두고 미묘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친구들과 사용하는 방법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움직이고, 비용은 깔끔하게 1/n로 나누는 것이다. 사실 비싼 식당과 비싼 커피숍을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저렴한 곳은 사람이 너무 몰리기 때문이다. 2019년 즈음이지 싶은데 무척이나 더운 어느 날 친구들을 파미에스테이션에서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노하우가 없어 가장 사람이 많이 붐비는 시간에 갔다. 식당이 너무 붐벼 식사하기도 힘들었지만, 차를 마실 곳은 아예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근처 메리어트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커피 한잔에 18000원이었다. 우리는 총 네 명이었기 때문에 디저트 하나 추가하지 않고도 음료 값으로 8만원 가까이를 지출했다. 가격이 비싼 만큼 호텔 커피숍은 조용했고, 사람도 별로 없기는 했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으로도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비결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남보다 일찍 움직이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일상 회복이 진행되면서 올봄부터는 조금씩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싶다면서 오전 11시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 코로나 때문에 너무 오래 못 보고 지냈기에 모두가 동의하여 11시에 만나기로 했다. 어디 갈까 우왕좌왕하기 싫어 식당도 미리 정했다. 예약이 되는 근사한 식당은 아니었지만, 강남역에서 나름 깔끔한 곳이었다. 일찌감치 나온 덕분인지 식당에는 아직 대기자도 없고 조용했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가도 역시 무척 한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카페로 이동하기 때문에 식당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카페도 먼저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여유있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 맞은 편 식당에는 대기줄이 길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카페에 들어갈 때는 두세 테이블 정도만 차있었는데, 나올 때 보니 빈 자리가 없었다. 그날 우리가 쓴 돈은 일인당 밥값 13000원, 커피 5000원으로 합쳐서 약 18000원 정도 되었다. 계산을 도맡아 했던 친구에게 카카오 정산하기로 각자 부담해야 할 돈을 송금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즐거운 대화도 하는데 18000원이면 되다니!
이후로도 나는 이 방법을 강남역 부근에서 몇번 더 테스트해 보았는데 늘 성공적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파미에스테이션에서도 테스트해 보았다. 11시 오픈하는 식당에 10시 50분에 도착하였더니 아직 준비중이라 조금 기다리기는 했지만,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조용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카페도 평소보다는 수월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외출이 잦고 또 그때마다 2만원 가량을 쓴다면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달에 한두번 정도라면 삶에 윤기를 더해주는 비용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돈을 전혀 쓰지 않는 외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폭염이나 폭우만 아니라면 친구를 만나 같이 산책을 해도 좋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산책로가 잘 가꾸어져 있고, 강변이나 개천변, 호숫가에 마련된 걷기 좋은 길들도 많다. 체력이 좋다면 한발 더 나아가 등산도 해볼 수 있다. 꼭 정상까지 오르지 않더라도 체력과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올라보는 것도 괜찮다. 체력 소모가 부담된다면 각 지자체별로 혹은 중앙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공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도 무료 입장이 가능한 곳이 많다. 구글 검색 한번이면 그날 무료로 볼 수 있는 전시의 목록을 구할 수 있다. 요즘은 백화점에서도 무료 미술 전시를 많이 한다. 떨치고 나가겠다는 의지와 대중교통 요금만 있으면 훌륭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교통 약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외출을 예찬하고 적극 장려할 때는 신체와 이동이 자유로운 것을 전제로 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분들도 외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정책 지원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https://www.shinsegae.com/culture/gallery/exhibition/view.do?glrySeq=1014&